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미국인 무의식 속엔 인종차별적 편견 여전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미국인 무의식 속엔 인종차별적 편견 여전

입력
2014.12.07 14:31
0 0

지난해 여름, 미국 뉴욕시 주민들은 그 해 11월 치러질 시장선거 TV광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더부룩한 곱슬머리로 누가 봐도 흑인에 가까운 소년이 민주당 백인 시장 후보 빌 더 블라지오 광고에 나와 “훌륭한 우리 아빠를 시장으로 뽑아달라”고 호소했기 때문이다.

이 소년은 더 블라지오 시장의 실제 아들인 단테 블라지오(17)였다. 단테는 더 블라지오 시장이 동성애 경력까지 있는 일곱 살 연상 흑인 여성 셜레인(60)과 결혼한 뒤 낳은 1남1녀 중 둘째였다. 확연히 다른 외모의 아들이 선거 광고에서 백인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지지를 호소한 데 힘입어, 당초 민주당 내에서도 존재감 없던 더 블라지오는 24년만에 민주당 소속 뉴욕시장이 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을 딛고 성공한 걸로 따지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빠지지 않는다. 그를 무명 정치인에서 대통령 후보감으로 부각시킨 계기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당시 기조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을 흑백을 구분하지 않는 나라로 지칭하며, “(아버지는 케냐 흑인 유학생ㆍ어머니는 백인인) 내 유산의 다양성에 감사 드린다. 양친의 꿈이 소중한 나의 두 딸 안에도 존재하고 있다. 나는 내 사례가 더 큰 미국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내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은 위대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인종문제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킨 이들도 그가 맡은 국가와 지역의 인종문제 해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오바마 당선 이후에도 미국의 인종 갈등은 여전하고, 더 블라지오의 뉴욕 시내에서도 흑인들의 인종차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압박하던 러시아, 중국, 북한마저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시위가 확대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나 잘 해’라는 식의 비난성명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의 콘스탄틴 돌고프 인권특사는 “미주리 주 퍼거슨 시와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사태가 미국 안정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국은 자국의 인권침해를 심각하게 다루길 바라며, 다른 나라에 공격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화춘잉 중국 외무부 대변인도 “인권에 관한 한 완전한 국가는 없다”며 우회적으로 미국을 비판했고, 북한 외무성 대변인도 “미국이야말로 인종 때문에 차별과 멸시를 당하고 주민들이 언제 총에 맞아 죽을지 몰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암담한 인권유린국가”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2014년 현재 미국의 인종문제는 어떤 상황일까. 1960년대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민권운동으로 흑인과 유색인종을 대놓고 핍박하는 법적ㆍ제도적 차별은 사라졌으나, 사회 전반의 관행과 주류 백인 시민들의 의식 저변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전제로 한 차별이 상존한다. CNN과 뉴욕타임스 등도 ‘인종차별주의자가 사라진 인종차별’(Racism without racis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퍼거슨과 뉴욕 클리블랜드에서 잇따른 사태의 원인을 미국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인종차별적 편견에서 찾고 있다.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 뉴욕시 등에서의 백인경관에 의한 흑인 치사사건 및 관련 대배심 불기소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된 가운데 6일(현지시간) 서부 시애틀의 항의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는 문구의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 뉴욕시 등에서의 백인경관에 의한 흑인 치사사건 및 관련 대배심 불기소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된 가운데 6일(현지시간) 서부 시애틀의 항의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는 문구의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서는 흑인은 인종차별로 여기지만, 백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억울한 강력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퍼거슨, 뉴욕, 클리블랜드에서의 억울한 흑인 용의자의 죽음 이외에도 지난해에는 자동차 사고로 도움을 요청하던 흑인 소녀가 백인 집 문을 두드렸다가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숨졌다. 2012년에도 플로리다 주에서 17세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이 비무장 상태인데도, 백인 방범대원과 시비로 다투다 피격돼 숨졌다.

범죄 통계도 미국 사법제도가 백인 대비 흑인ㆍ유색인종에게 가혹하게 집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시민자유연합(ALCU)에 따르면 2007~2010년 보스턴 경찰이 불심검문한 사람들을 조사했더니, 전체 인구의 24%밖에 되지 않는 흑인 비율이 63%에 달했다. 반면 인구의 54%를 차지하는 백인 비율은 21%에 머물렀다. 인구 대비 흑인(3%) 재소자 비율도 백인(0.5%)보다 6배나 높고,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비율도 흑인(100만명당 50명)이 백인(100만명당 5명)보다 10배나 높다.

인종차별은 일상의 아주 사소한 데에도 만연하다. ‘흑인 성인 남성이라면 한번쯤 쇼핑 몰에서 경비원에게 이유 없이 붙잡힌 적이 있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 TV 드라마 트레메에 출연한 유명 배우 랍 브라운은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다가 절도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뤘다. 지난해 뉴욕 맨해튼 메이시 백화점에서 어머니에게 선물을 주려고 140만원 고급시계를 카드로 결제하려다가, 도난카드로 의심한 경비원 3명에게 체포돼 수갑이 채워진 채 보안구역으로 끌려갔다. 신분증을 제시했는데도 서너 시간 수모를 당한 뒤에야 풀려났다.

CNN이 보도한 인종차별 실험결과도 충격적이다. 시카고대 연구팀이 구직 광고를 낸 1,300개 기업에 이름만 다르고 나머지는 모두 같은 5,000개 이력서를 보냈더니, 백인이 사용하는 ‘브렌든’일 경우 구직 인터뷰 허용 건수가 ‘자말’이라는 흑인 이름보다 50%나 많았다. 이 실험을 주도한 도린 로우리 교수는 “미국의 인종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 침투한 의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종갈등이 ▦흑백간 빈부격차 확대 ▦미국 사법부의 보수화 경향 ▦9.11테러 등 안보불안과 맞물려 심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해결책 모색도 그만큼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특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2001년 취임 연설에서 ‘인종 프로파일링’ 철폐를 약속했던 걸 상기시키며,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고 보도했다. 인종 프로파일링이란 특정 인종이나 종교의 범법 가능성을 높게 간주하고 별도 징후가 없더라도 다른 집단 대비 감시 수준이나 대응을 강화하는 미 사법당국의 관행이다.

부시 행정부는 폐지 법안을 마련했으나, 9.11테러로 이슬람 집단에 대한 미국 내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흐지부지 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 행정부도 경찰폭력 대책으로 이 제도 폐지를 공언했으나, 공항이나 접경 지역 출입국 관리 등 광범위한 예외를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공화당 집권 시절 진입한 대법관이 다수인 미 대법원의 보수성향도 인종갈등 문제 해결의 걸림돌로 지목된다. 워싱턴포스트는 “올해 4월 대법원이 ‘소수계 우대조치’ 폐지에 합헌 결정을 내렸다”며 “이는 인종차별을 시정하려는 조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히스패닉과 기타 유색인종의 인구 증가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백인 주류사회가 소수계에 대한 우대조치를 그들에 대한 ‘역차별’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흑인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 침묵을 지키지만 상당수 백인은 퍼거슨 사태를 인종차별이 아닌 ‘법 집행’문제로 여기고 있다. 또 미국 사회 흑백차별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흑인은 95%가 ‘심하다’고 응답한 반면, 백인은 16%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흑인들의 차별 철폐요구가 이번에도 주류 백인사회의 몇몇 생색내기용 대책으로 사그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