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탈곡기 따발총 소리 신나던 차...콩알은 사정없이 날아가고
버려둘까, 싶다가도 여름내 힘겨웠던 전우애 떠올려
1km떨어진 석재상 오가며 유모차로 폐석판 나르는 할아버지 내가 계산기 두드리는 사이
논두렁에 30여 장 가지런히 느린 움직임이 변화 만들어 내
왕년 취사병의 폭풍 울금 썰기...두어 시간이면 될 듯하더니 7시간 걸려 손목에 파스까지
연 사흘 야근을 했다. 5년 전, 한 젊은 정형외과 의사가 발가락이 아파 죽겠다는 내게 혹시 야근하냐고, 통풍의 원인 중에 불규칙한 생활도 큰 이유라며 겁주기 훨씬 전부터 밤을 새야 하는 야근이 싫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린 나이 때부터, “이젠 늙어서 밤새는 것도 쉽지 않아” 하며 궁금해 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며 다녔다. 회사 접고 나서도 야근 안 해도 되니 좋다고 떠들었다. 그런 야근을 지금 며칠째 하고 있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토란 캐고, 양파 심고, 울금 뽑고, 거기다가 꾸러미 발송일까지 겹쳐 쌀 도정하고 포장하느라 야근에 마감 초치기까지 한 셈이다. 그거 싫다고 도망 아닌 도망을 와서는 헤드랜턴까지 머리에 두르고 있는 내 모습이 속상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니 욕할 대상도 없다. 손 느린 내 탓을 하는 수 밖에.
느릿하고 굼뜬 모습은 입사 초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취재를 피해 도망가는 취재원을 쫓아 열심히 뛰던 타사선배가 뒤에서 걸어오는 나를 돌아보고는 “넌 새파란 놈이 왜 안 뛰어! 차장인 나도 뛰는데”라며 소리를 질렀다. “싫다는 사람 쫓아가는 게 싫어서요” 했더니 싹수가 노랗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또 한 번은 검찰조사를 받고 나오던 고위 권력자의 차에 달라붙은 채로 차와 같은 속도로 뛰어가는 모습이 뉴스 생방송에 잡혔나 보다. 회사로 들어오니 선배들이 “와~ 원유헌이가 웬일로 저렇게 열심히 뛰었냐”며 감탄했지만, 나름 열심히 해 본다고 차 창문에 팔을 집어 넣었다가 닫히는 창문에 끼어서 끌려간 거라는 설명은 안 했다. 차 안의 여러 팔 들 중 유독 굵은 내 팔뚝만 안 빠졌던 게 창피했다.
운전도 느려터져 이젠 가까운 순천에만 가도 겁난다. 끼어드는 차가 낯설고 뒤에서 빵빵거리는 차들이 무섭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다. 혹시 서울 갈 일 있어도 그냥 버스 타고 전철 타는 게 편하다. 이제는 사람들까지 조금 낯설다. 옷차림도 나와 다른 것 같고, 그 사람들이 혹 나를 촌놈인줄 알아 볼까 신경도 쓰인다. 헌데 유심히 보니 기운들은 없어 보였다. 하나같이 고개 숙인 모습은 겸손하다기 보다는 패배자 같다고나 할까. 예전보다 길게 느껴지는 환승로에서 밀고 밀리는 사람들을 보니 ‘어디로들 저렇게 가는 건가. 뭐 하러 가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긴 뭐, 나도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그냥 살았었는데 뭐...
그래도 이곳 야근은 밤하늘을 보며 눈요기 하는 재미가 있다. 눈처럼 뿌려진 별들이 너무 많아북두칠성 찾기가 쉽지 않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오리온도 보고, W 모양의 카시오페이아 날개에서 다섯 치 옮기면 있는 북극성도 찾고. 그렇게 울대가 뻣뻣해지도록 올려다 보면서 걸어가다가 콩을 말리는 덕석에 걸려 보기 좋게 넘어졌다. 늘어놓은 콩대에 얼굴 처박고 손도 까지고, 무안해서 ‘누가 본 사람 없겠지’ 하는데 아직도 지 어미가 진돗개였는 줄 아는 희동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빛이 ‘저것도 인간이라고 쯧쯧’ 하는 듯해 기분이 상했다. 조그만 돌멩이를 희동이한테 날리고 일어서는데 “껌껌헌데서 뭐 하는가?” 소리에 깜짝 놀랐다. 유모차 할아버지였다. “예? 아무것두요. 헤헤”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눈에도 다쳤던 흔적이 남아있는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다. 내가 농기구라고 주장하는 트럭이나 경운기는 물론 자전거 따위도 할아버지에겐 없다. 유일한 운송수단은 언뜻 카트처럼 보이는 망가진 유모차뿐이다. 가끔 힘든 일을 하시는 것 같을 때 도와드리겠다고 하면 “괘얀어, 어여 가”, 하신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냐고 하면 “그냥 허믄 돼야”가 대부분의 답이다.
하루는 근처 석재상에서 못쓰는 석판을 유모차로 나르시길래 도와드린다고 했더니 또 같은 대답을 하셨다. 그래도 “몇 장이나 옮기셔야 되는데요?” 여쭸더니 “몰라, 그냥 하는데 꺼정 할려구” 하셨다. 나도 밭을 갈아놔야 해서 이리 저리 궁리하고 종이에 그림으로 밭 디자인도 해보고 하면서 농막을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할아버지는 내가 집에 밥 먹으러 갈 때도, 다시 농장으로 올 때도 돌을 나르고 계셨다.
밭 구상은 결론도 못 내고 해는 저물어가는데 어떻게 작업하셨나 논두렁에 내려가 보니 석판 30여장이 타일처럼 예쁘게 붙어 있었다. 석재상에서 논까지 거리가 1km는 되는데 기껏해야 3장씩 10번은 왕복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졌다. 손가락 까딱거리며 노동의 효율과 경제성을 따지는 사이에 할아버지는 느리게라도 계속 움직이셨고 이내 순식간처럼 변화를 만드셨다. 그제서라도 뭔가 해야겠다 싶어 괭이를 가져오는데 귀가하시던 할아버지의 인사말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늦게꺼정 애쓰네이~”
며칠 전 아침 일찍 농업기술센터에서 콩 탈곡기를 빌려왔다. 콩만 마무리하면 이제 큰 일은 끝난다. 곧 겨울잠 시즌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의욕도 솟고 몽롱한 눈동자에 기운도 들어왔다. 셋팅을 끝내고 탈곡기 주둥이에 콩대를 한 다발 넣으니 콩이 따발총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이렇게 신나고 경쾌한 드럼소리가 있을까. 이렇게 유쾌한 효과음이 있을까.
신나서 콩을 털고 있는데 장씨 아저씨가 농장으로 들어오셨다. “아저씨, 얼른 마치고 아저씨 콩 털어드릴까요?” 기세 좋게 말씀 드렸더니 “허어 이사람아, 똥구녕으로 콩 다 빠져 나가네이” 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하고 탈곡기 출구 쪽을 살펴보니 콩알들이 부채꼴 형태로 한 10미터 가량 널려 있었다. 바람조절을 잘못한 탓에 제자리에 떨어져야 할 콩이 사정없이 퍼져 날아간 것이었다. “헛일하고 있네 이런. 좀 봐 감서 해야지 눈 앞만 보고 헌당가 그래.” 의욕이고 기운이고 다 콩 따라 날아가버렸다.
콩을 다시 주워 담을 일이 까마득하고 짜증까지 나 탈곡이고 뭐고 다 싫어져 버렸다. 대형 선풍기로 콩깍지를 날려버리면 콩 줍기가 편할까 생각도 하고, 진공청소기 주둥이를 콩 모양으로 맞춰서 빨아들이면 안될까 하다가 ‘콩에 철분이 많다면 자석에 쫙 붙을텐데’ 식으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수준 낮은 상상까지 이어졌다. “뭔 생각 허는가. 버릴게 아니면 거둬야지. 어먼 대그빡 쓰지 말고 그냥 줏어!” 아저씨는 속을 들여다 보시는 재주가 있는지 호통치듯 말씀하고 가셨다.
그냥 버려둘까 하는 잔인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꼭 곡식이라서가 아니다. 콩과 나는 그 뜨거운 여름내 함께 지열을 느끼고 풀을 이겨내며 힘겹게 씨를 맺은 전우요, 동지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콩이다. ‘그래, 일단 줍자. 이것 저것 재지 말고 그냥 줍자.’ 시작이 반이요, 반나절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모두 오산이었다. 점심밥도 농장에서 때우며 콩 줍는데 집중했건만 날이 어두워지도록 절반도 못했다. 시작도 못한 셈이다. 힘쓰는 일도 아니고 오리궁뎅이 달고 다니며 열심히 앉아서 주웠지만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니 끙끙 소리가 절로 났다.
사실 잘 뵈지도 않는 조그만 콩을 장시간 줍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신체 기럭지는 김병만 쪽인데 손가락 굵기는 최홍만 쪽이니 저주받기 직전이라고 할 이런 몸뚱아리는 내 안의 적이었다. 하지만 단점은 또한 역으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했지 않은가. 이런 특이 체형이 어떤 일에 유리할까 다시 생각해 봤다.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사는 수 밖에.
땅거지 작업은 다음날 하루를 다 잡아먹었다. 막바지 작업은 다시 헤드 랜턴을 써야 했다. 마침내 일을 끝내고 나니 스스로가 대견했다. 요령부리지 않고, 괜한 계산하지 않고 해낸 일이라 더 뿌듯했다. 그러고 나니 슬그머니 궁금했다. ‘내가 주운 콩이 얼만큼일까. 일하고 나서 그냥 재보는 게 나쁜 버릇은 아니잖어?’
저울을 대령해서 계산을 시작했다. 따로 주운 콩은 총 3.5kg, 콩 50알로 대략 평균을 내보니 한 알 당 0.3g, 그러면 콩알 수는 약 12,000개, 다 거두는데 10시간쯤 걸렸으니 쉬지 않고 3초당 한 개 정도씩은 찾은 셈이다. 열악한 신체 조건으로 참 멋지게 해낸 거다. 콩이 그만큼이면 얼만가 알아보니 약 00원. 괜히 계산했다. 다시 우울해졌다.
다음날 울금을 조졌다(실제로 식재료를 정리할 때 할머니들이 쓰는 표현이다). 가루를 내기 위해 쪄서 말리려면 절편 모양으로 썰어야 했다. 내가 누군가. 조리사 자격은 없어도 조리사들이 부러워하는 칼솜씨의 퇴역 취사병 아닌가. 20kg 정도니까 600rpm의 속도로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지 싶었다.
결국은 7시간 걸렸다. 검지 손톱 귀탱이도 날려먹었다. 뭐든지 생각하는 것보다 세배는 더 걸린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다. 하는 일마다 막판에 ‘이렇게 하면 잘 되네. 진작 이렇게 할 걸’ 하는 생각 역시 매년 했었다. 계산법도 서툴고 학습능력도 떨어진다. 내년에도 또 그럴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도 그냥 하는 수 밖에 없겠지.
오랜만의 칼질로 뻐근해진 손목에 파스를 붙이는데 옆 동네 동생 D가 들어왔다. “아 형님, 촌시럽게 파스가 뭐다요. 일 못하는 거 티내씨요 시방.” 면박을 준다. 작은 크기의 파스였지만 손목에 두 장을 붙였는데도 사이가 뜨는 게 신경이 쓰여 손으로 잡아 당겨 꾹꾹 누르고 있었다. “오죽 격무에 시달렸으면 그러겠냐” 답했지만 강하게 부정할 순 없었다.
동생은 차 한 잔 마시자면서 호(號)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형님, 구례에서 글 좀 읽고 글씨 좀 쓰는 분들은 다 호가 있어요. 형님도 뭐 하나 허시지라.” 농사도 제대로 못 하는데 무슨 호 타령인가 하다가 “내 호? 그냥! ‘그냥’ 원유헌으로 불러 줘.” 했다. 뭔 소린가 쳐다보더니 의미를 설명하니까 동생도 좋단다. “낙관 하나 파시지요. 그냥 선생.” 별 것도 아닌 얘기로 낄낄거리다 보니 기분도 나아진다.
“근디 형님, 손목은 뭐 하다가 그러셨대요. 언 땅에 삽질이라도 허셨능가요.” 묻기에 썰어 놓은 울금을 가리키며 “오랜만에 칼솜씨 좀 꺼내 쓸라니까 힘드네. 그래도 7시간 만에 다 했어. 훌륭하지?” 으쓱해 하며 답했다. 허탈한 표정의 타박이 단박에 돌아왔다. “형님! 좀 물어보기도 허고 요령도 부려감시롱 허시요. 이거 기계 빌려와서 허면 30분이면 허요. 왜 근다요. 짠허게스리.” 얘기를 듣고 나니 괜히 부아가 났다.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기도 하고 바보 취급 받은 듯도 했다. 동의해주기 싫었다. “냅둬! 그냥 그렇게 살랑게! 어따 지적질이여.” 나도 모르게 나온 사투리에 조절 안된 톤으로 질러댔지만 기분이 안 풀린다. 기계가 있는 줄 알았어도 그냥 칼질을 했을까. 내가 봐도 내 모습이 적잖이 짠하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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