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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참요(讖謠)가 나도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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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참요(讖謠)가 나도는 이유

입력
2014.12.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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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요(讖謠)란 정치적 징후나 시대 상황 따위를 시사하는 노래를 뜻한다. 조선 숙종 때 유행했다는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 철이라~”는 ‘미나리 요(謠)’가 그런 참요다.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뜻하고,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한다는 것인데, 인현왕후가 속해 있던 당파인 노론(老論)의 모사꾼들이 창작해서 유통시킨 노래다. 민씨는 비록 쫓겨나고 장씨가 왕비가 되었지만 민씨가 다시 복위할 것이라는 정치적 희망을 담은 노래다. ‘미나리 강회’라는 음식도 있다. 쇠고기 편육과 홍고추, 달걀지단을 살짝 데친 미나리에 싸서 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인데 사가로 쫓겨난 폐비 민씨가 복위를 염원하며 먹었다는 음식이다. 지금도 희빈 장씨는 악독하고 인현왕후 민씨는 어질었다는 식의 인식이 퍼져 있는 것은 노론의 시각으로 당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에 인현왕후 민씨가 희빈 장씨의 종아리를 때린 사건이 기록되어(숙종실록 12년 12월 10일)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민씨와 장씨는 각각 노론과 남인 당인의 처지에서 권력다툼에 나섰던 것이지 누구는 착하고 누구는 악한 선악 구도로 바라볼 사안은 아니었다. 민씨는 숙종과 장씨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숙종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권해서 노론 김창국(金昌國)의 딸을 들였지만 숙종의 총애를 얻는데 실패하고 결국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노론의 모사꾼들이 ‘미나리, 장다리’ 운운하는 참요를 만들어 퍼뜨렸고 결국 민씨는 다시 복위할 수 있었다. 이는 숙종이 총애하는 여성이 속한 당파에게 정권을 맡기는 형태로 정국을 운용하면서 나타난 왕조의 말기현상들이다.

중국사에도 참요는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북제(北齊)의 좌정승 곡률광(斛律光)을 제거하기 위해서 북주(北周)의 대장 위효관(韋孝寬)이 만들어 퍼트린 참요다. 북제서 ‘곡률광 열전’에는 곡률광에 대해서 집안에서도 몸가짐이 엄숙했고, 검약한 생활로 뇌물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전선에 나가면 늘 사졸들 앞에 나가 싸워서 북주(北周)의 공격을 여러 차례 격퇴해 좌정승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위효관은 곡률광이 북제의 상서우복야(尙書右?射) 조정(祖珽)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이용해 참요를 만들어 퍼뜨렸다. “백승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명월은 장안을 비추네(百升飛上天 明月照長安)”라는 노래였다. 곡(斛)은 곡식을 헤아리는 단위인데 100승(百升)이 1곡(斛)이니 100승은 곡률광을 뜻한다. 또한 명월(明月)은 곡률광의 자(字)였으니, 곡률광이 임금이 되어 장안에 군림할 것이라는 노래였다. 또한 “고산은 밀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고, 곡수는 붙잡지 않아도 스스로 굳세지네(高山不推自崩 ?樹不扶自堅)”라는 가사를 덧붙였는데, 고산(高山)은 북제의 왕성(王姓)인 고씨를 뜻하고, 곡수(?樹)는 곡률광을 뜻했다. 조광은 이 노래를 듣고 곡률광을 모반으로 몰았는데, 북제 임금 고위(高緯)에게 이런 참요가 나도는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곡률광은 북제(北齊) 무평(武平) 7년(576) 모반죄에 걸려 일족이 멸족당하고 말았다. 북제는 서기 550년 문선제 고양(高洋)이 선비족이 세운 동위(東魏)를 무너뜨리고 세운 왕조로써 고구려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데, 곡률광을 제거한 이듬해 나라 자체가 망하고 말았다.

숙종 초 조정에 나와서 북벌과 신분제 완화 같은 각종 개혁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 백호 윤휴(尹?ㆍ1617~1680)인데, 그가 숙종에게 지어올린 글 중에 ‘공고직장도설(公孤職掌圖說)’이라는 것이 있다. 윤휴가 숙종에게 “후세의 어둡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임금들을 언급했으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소서”라는 서문과 함께 여러 사례를 들어서 써 올린 글이다. 그중에 “역대로 간교한 무리들이 안에 있으면서 현자를 미워하고 남의 공로를 시기하여 대장을 내쫓거나 죽여서 나라가 망하는 화를 가져온 경우”를 들면서 “곡률광(斛律光)이 죽자 적군들이 서로 축하한 일”도 들었다. 그런 윤휴는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서인(노론)이 정권을 잡은 직후 사형 당하는데, 이때 그를 죽여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이 인현왕후 민씨의 큰 아버지인 민정중(閔鼎重)이었다. 민정중은 한때 “세상은 어찌 이리도 적막한지/강호에 유일의 선비가 살고 있네(宇宙何寥?/?江湖有逸人)”라면서 윤휴를 칭송했으나 나중에는 아무 죄도 없는 윤휴를 죽여야 한다고 적극 주청했으니 정치는 그만큼 비정한 세계이다.

청와대 내부 문건 유출을 계기로 벌어지는 각종 폭로전은 그만큼 비정상적인 행태로 정권이 운용되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직기강비서관을 비롯해서 기무사령관 같은 요직들이 비선 라인들의 암투에 의해서 쫓겨나거나 득세했다는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는 현 상황은 정권뿐만 아니라 나라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말해준다. 권력은 국민들이 잠시 맡긴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맹성(猛省)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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