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 일상을 채우는 것, 고통을 주는 요소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지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견딜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덕후’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아는 존재다. 덕후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대상을 발견해 몰두하며 전문성을 구축한다. 몰두할 대상이 있기에 세상의 오지랖에 둔감하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즐거워한다. 그렇게 자존감을 지킨다. 자존감이 높기 때문인지 공격성도 적다(‘선(先)빵’만 날리지 않으면 되는데, 선빵으로 인해 공격성을 표출한 일례를 보고 싶으면 검색창에 ‘나의 아스카는 그렇지 않아’를 검색해보자).
나는 관심사가 넓고 얕아 덕후는 못된다. 내 행복의 전략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는 것, 괴로운 일은 피하는 것이다. 유머감각이 다른 사람들(예를 들어 외모 비하 개그를 웃기다고 내뱉는 사람들), 고민 없이 세상이 주입한 편견을 내뱉는 사람들, 손에 쥔 알량한 권력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는 이들, 충분히 설득하지 않고 명령하는 이들을 접하면 괴롭다. 편견에 의해 상처 받는 사람들, 모욕감에 치를 떠는 사람들, 지나친 자기착취로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을 봐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는 존재기에 세상의 괴로움을 외면해버리는 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세상에 산재한 고통들은 감소돼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복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은 엔돌핀, 도파민, 세로토닌 등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양과 활성화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어떨 때 신경전달물질이 활성화되는지 과학적으로 측정된 경향성이 있으나, 개인마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다. 가학적 행위를 할 때 유달리 쾌감 관련 신경전달물질이 활성화되는 사람이 그 예다. 세상에는 피학적 행위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니 둘이 만나 개별적으로 쾌감을 공유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가학적 행위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졌을 때다. 국가 권력을 가졌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국가는 국가구성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헌법적 의무다. 법안을 만들고 정책을 집행하는, 한국사회의 구조를 만드는 사람들의 책임은 막중하다. 그런데 이들을 보면 국민들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의심된다. 점점 더 일반 국민들의 고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서민증세’로 요약되는 2015년 조세제도만 봐도 그렇다. 그 중 하나가 담뱃값 인상인데, 나는 비흡연자고 같이 사는 사람도 비흡연자였으면 좋겠지만 담뱃값을 대폭 인상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시간과 자원의 여유가 보장돼야 ‘웰빙’의 삶을 살 수 있고, 보편적 복지의 수준이 낮은 한국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다. 이들이 즉각적으로 위로 받고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담배, 술, 각종 자극적인 음식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온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기려는 국가를 보니 화가 난다. 내가 원하는 한국은 그렇지 않아!
담뱃값을 올리기에 앞서 국민 전반의 삶의 질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이 선행돼야 했다. 이를 위해 증세가 필요할 수 있지만, 세상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방향은 옳지 않다. 재원 마련을 위해 소득세와 법인세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는 이런 맥락에서다. 일정 수준의 자원을 가지고 있고, 보편 수준 이상의 삶의 질이 보장된 이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인다면 그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적다. 사회 전체의 행복의 양을 계산해서 정책을 수립한다면 방향은 이토록 명확한데, 왜 이러는 걸까? 집권자들이 가학 성애자인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타인의 고통을 보면 자신도 고통을 느끼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구현하는 것을 추구하며, 이를 위해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전문성 있는 ‘정치덕후’들이 집권하는 한국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최서윤 (격)월간잉여 발행ㆍ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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