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시위 유혈진압 혐의 기각
판결문이 낭독되는 내내 옛 독재자의 얼굴은 돌덩어리처럼 굳어있었다.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법정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은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30년 동안 이집트를 강권 통치했던 86세 노인은 두 아들과 껴안고 키스하며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반면 2011년 민주화 시위 당시 사망자들의 가족과 인권 단체 등은 탄식을 쏟았다.
이집트 사법부가 2011년 민주화 시위대 유혈진압과 부패 혐의 등으로 구속 중인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 2011년 ‘아랍의 봄’으로 도래했던 이집트의 민주화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카이로 형사법원은 29일 파기환송심 선고에서 무바라크와 전 내무장관 등 고위 치안 관계자 5명의 민주화 시위대 유혈 진압 혐의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날 시장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이스라엘에 이집트의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과정에 무바라크가 연루된 혐의 등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날 판결로 무바라크는 곧 석방될 가능성이 높다. 무바라크는 지난 5월 그의 집 보수를 위해 국고를 이용한 혐의로 3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2011년 민주화 시위 여파로 축출된 뒤 3년 넘게 구속돼 있는 상황이라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풀려나게 된다. 무바라크는 이날 친정부 성향의 엘발라드TV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잘못한 게 전혀 없다”며 “지난번 유죄 선고 때도 나는 헛웃음만 나왔다”고 밝혔다.
무바라크에 대한 무죄 판결은 압델 파타 엘시시 전 이집트 국방부 장관이 지난 6월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어느 정도 예감돼 왔다.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권좌에 오른 무바라크는 군부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해왔고 축출 뒤에도 군부에 입김을 행사해 왔다. 친정부 매체들은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을 강조하며 판결을 지지하는 듯한 보도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이날 보도했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 민주화 시위 사망자 가족과 민주화 인사와 인권 단체 등은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화 시위 당시 경찰에 의해 아들을 잃은 사이드 압델 라티프는 “무바라크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다”며 “(2011년의) 혁명은 끝이 났다”고 주장했다. 이날 밤 1,000명 가량이 카이로 소재 타히르 광장 주변에 모여 판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집트 보건부는 이날 시위로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했다고 30일 밝혔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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