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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양반 김낙세 없었다면 상주동학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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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양반 김낙세 없었다면 상주동학은 없었다

입력
2014.11.2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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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동학 숨은 주역

서른둘에 상주동학교 입교...현재 교당 터 주선해 주고 재산 털어 교당 건립에 쾌척

천도교가 안아야 할 이유

동학 시대상황에 맞게 변모 천도교도 갑진개혁으로 체제 변화

상주동학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상주동학교당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부주교 김낙세의 반신사진과 그와 관련된 유물들. 유물들 중에는 일기를 비롯해 일제가 작성한 김낙세의 사망진단서가 놓여 있는데 사망원인은 '고문치사'가 아닌 '영양실조'로 날조돼 있다.
상주동학교당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부주교 김낙세의 반신사진과 그와 관련된 유물들. 유물들 중에는 일기를 비롯해 일제가 작성한 김낙세의 사망진단서가 놓여 있는데 사망원인은 '고문치사'가 아닌 '영양실조'로 날조돼 있다.
상주동학 교주 김주희의 손자 김정선씨가 지난달 말 교당 이엉을 교체할 목적으로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다. 이엉 교체작업은 매년 이맘때 벌어지는 연례행사로 교도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1910~40년대는 부주교 김낙세의 주도 아래 한 달간 이뤄졌다.
상주동학 교주 김주희의 손자 김정선씨가 지난달 말 교당 이엉을 교체할 목적으로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다. 이엉 교체작업은 매년 이맘때 벌어지는 연례행사로 교도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1910~40년대는 부주교 김낙세의 주도 아래 한 달간 이뤄졌다.

못다 한 이야기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려한 주연 뒤엔 탄탄한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상주동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상주동학 교주 김주희는 1894년 10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목숨을 건졌다. 우여곡절 끝에 1915년 6월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에 교당 터를 잡았다. 이 기간의 행적, 그러니까 김주희가 우금치전투를 ‘개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판단하고 사력을 다해 도망쳐 상주동학교를 만들기 전까지를 추적해 보면 특기할 만한 한 사람을 만난다. 부주교 김낙세(1869~1944)다.

김낙세는 오리지널 양반이다. 자는 세숙. 호는 하암. 관향은 풍산이다. 고려판상사 문적(文迪)의 25세손으로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에서 태어났다. 동학에 입도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 때였다. 양반신분으로 동학도가 된 계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1915년 안동에서 우기리로 거주지까지 옮겨와 열렬한 동학도가 되었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덕분에 교당 남재에 기거하며 학동(學童)을 길러냈다.

김낙세가 김주희와 인연이 닿은 것은 1910년 무렵이었다. 당시 김주희는 교당을 건립할 뜻을 품고 있었지만, 자금이 모자라 고민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김낙세는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김주희에 비해 상주 지리에 밝았던 김낙세는 마침맞은 교당 터를 주선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산을 털어 건립비용도 충당해주었다.

그렇게 1915년 6월 29일 터 닦기 작업에 들어갔다. 7월 11일 북재 상량식을, 10월 8일에 서재 상량식을 가졌다. 김주희의 숙원이 이뤄진 것이다. 교당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하지만 개교식은 3년 뒤에 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공식인가가 1922년 5월 29일에나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주희가 상주동학교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면, 김낙세는 주도적 인물이었다. 출신성분을 따져보면 김주희는 최제우(양민)와 김낙세는 전봉준(선비)과 함께 묶일 수 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입각하면 김주희는 바깥주인이었고, 김낙세는 안주인이었다. 교당을 알차고 건실하게 운영해 나간 이가 김낙세였다. 1943년 11월 일제 탄압 이후 김주희는 병보석으로 풀려난 반면, 김낙세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사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김낙세는 상주동학교당에서 시쳇말로 멀티플레이어였다. 교당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교당 인가, 경전과 가사의 출판, 포교, 교도관리 등 교당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특히 교당 운영의 기본이 되는 교도의 확장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상주동학교도가 되려면 간부급 인사의 추천을 받아야 하고, 또 가족단위로 입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기리가 ‘안동촌’으로 불리게 된 연원은 안동 양반 김낙세의 고향 포교가 탁월한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인 학연, 지연, 혈연의 묘(妙)가 작동된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김낙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일기다. 그는 생전에 17권의 육필일기를 남겼다. 그 일기는 김낙세 사후 70년간 ‘판도라의 상자’ 안에 잠들어 있다. 2000년대 들어 상주동학교당과 교당이 보유한 유물의 가치를 알아본 동학연구가들에 의해 번역되었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판도라의 상자가 온전히 열리면 또 어떤 기막힌 사실이 드러날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들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 판도라의 상자는 3년 내로 열릴 것 같았다. 하지만 가망이 없어졌다. 경북도는 최근 ‘김낙세 일기 번역 프로젝트’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속사정을 들어보니, 담당 국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란다. 행정의 연속성이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아서 단절되기도 했다가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지만, 전액삭감은 너무했다. 경북도는 ‘한국 정신의 창(窓)’이요 ‘대한민국 문화콘텐츠의 보고(寶庫)’라고 자부하는 도시이지 않던가.

못다 한 이야기2

‘구국이란 정답은 같았으나 방정식이 달랐다.’

‘변경(邊境)의 동학-상주동학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 점을 또렷하게 알려준다. 시리즈 제목을 ‘변경의 동학’이라고 한 데는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상주동학의 지대한 가치를 우리 역사가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동학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천도교조차 상주동학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이유로만 보면 변경은 단순히 ‘중심부에서 저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변방(邊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변경은 발칙한 의미도 갖고 있다. ‘가장자리에서는 중심부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는 역발상의 용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기정사실화 한 중심부의 역사를 주변부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미국사학자 터너가 고안한 용어다. 관점이 달라지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상주동학’이란 변경의 관점으로 동학을 이야기 할 때, 그동안 우리가 모르고 있었고, 안다고 해도 다르다고 간주하고 살았던 동학의 일부를 바로 볼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실제 상주동학의 관점으로 동학을 보면 그 역사가 보정된다. 우리 역사는 동학농민혁명의 최후를 대둔산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일본-조선 연합군은 1895년 2월 17일 ‘대둔산에 숨어있는 적괴를 토벌하라’는 상부명령을 받고 출동한다. 연합군은 이튿날 새벽 5시를 기해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은거지에는 허름한 초가가 3채였고, 3면이 큰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에서 어린 소년 1명과 28~29세의 임산부를 포함한 26명의 농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신식무기를 앞세운 연합군은 어린 소년을 제외한 25명 전부 사살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천황폐하 만세!”

동학농민혁명이 일단락되고, 3세 교주 손병희는 목숨을 부지한 교도들과 함께 조용한 애국애민 활동을 지속했다. 동학도가 다시 역사의 현장에 전면 등장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다. 그 시기 상주동학교는 버젓한 교당을 갖고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45년 11월 탄압 전까지 상주동학교의 행적은 최제우의 사상을 통해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 만민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대환경이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학 정신을 공유하고 후대에 전하려는 상주동학교의 작업들은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일제가 상주동학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이유는 ‘경전과 가사로 동학을 퍼뜨리려’했기 때문이었다. 70년이 흐른 지금, 상주동학교당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곳에는 289종 1,400여점의 동학유물이 보존돼 있다. 그런데도 상주동학은 동학의 주변부로 남아 있다. 왜일까.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이지 상주동학교가 산골짜기 변방에서 맥을 이었기 때문일 터다. 천도교가 상주동학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수의 천도교인들은 “동학 교조 최제우의 사상을 김주희가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동학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천도교는 최제우의 사상을 온전히 지켰고, 상주동학교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동학’으로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역사는 흐릿하게 기억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동학운동이 있었다. 1904년의 갑진민회운동이다. 최시형 순도 후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일제의 체포망을 피해 망명길에 올라 일본으로 피신한다. 거기서 동학 새 옷 입기를 구상한다. 이른바 ‘동학의 근대적 종교체제’ 구상이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도를 동원해 진보회를 조직한다. 그해 10월 8일, 조선반도 360곳에서 30만명이 일제히 양복입기와 단발을 단행한다. 이를 민간조직이 갑진년에 일으킨 운동이라고 해서 갑진민회운동이라고 한다. 천도교에서는 달리 부른다. 천도교가 주도한 대(對) 민중 의식개혁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갑진개화운동이라고 한다. 손병희는 당시 이 운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 당국과 우리나라 개혁의 밀약을 굳게 맺은 뒤에 일본을 위해 러시아를 치는 한편, 국권을 잡은 뒤 정치를 혁신하면 우리나라 재생의 도(道) 이에 있을 뿐이라.”

이상하지 않은가. 동학농민군을 무참히 짓밟았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오간데 없고 되레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갑진민회운동으로 동학도는 또 한 번 탄압을 받는다. 국내에서 이 운동을 지휘했던 이용구는 일제의 협박과 회유로 친일파로 돌아섰다. 돌아온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다. 천도교는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이용구를 포함한 친일행위를 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했다. 이는 본류인 교조 최제우 사상을 버린 결과가 아니다. 시대상황에 맞게 교의 운영체제를 변용해 적용하려다 생긴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손병희 입장에서는 운영의 묘를 살려 위기를 기회로 넘으려는 전략적 실천이었다. 뭇 대중이 천도교와 동학은 다른 종교라고 오해하는 것은 시대상황이란 변수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동학교에 대한 오해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산골오지에서 경전과 가사를 변종해 민족종교의 맥을 이으려고 했던 상주동학교가 ‘또 하나의 동학’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김주희를 위시한 상주동학 교도들이 만약 새로운 종교를 꿈꿨다면, 굳이 ‘동학’이란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김주희가 최제우 사상을 전복시키려 했다면, 수종의 경전과 가사를 만들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금지옥엽으로 여길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시대상황’이라는 변수를 포용의 수단이 아닌 아전인수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상주동학교가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된 것은 ‘동학을 유포한 죄’다. 이건 팩트(fact)다. 또 하나의 사실은 상주동학교가 국내 유일의 동학 유물 보고(寶庫)라는 점이다. 결국 구국이란 정답은 같았으나 방정식이 달랐다는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글·사진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題字: 혜정 류영희

The Story of Sangju Donghak (7)

- Epilogue - Remainders -

Remainders (1)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a star cannot perform brilliantly when surrounded by untalented supporting actors. In other words, without excellent supporting actors or actresses, no hero or heroine can thrive. The case of Sangju Donghak illustrates this concept.

Kim Joo-hee, the Leader of Sangju Donghak, was an outstanding idealist. Twenty years after he escaped from the Woogeumchi Battle, he founded Sangju Donghak compound at Woogi-ri, Eunjeok-myon, Sangju County in June 1915. During the next 20 years, Kim, Joo-hee struggled to establish an institution through which he could spread his ideas and vision of ‘Core’ Donghak, with modified methods; he had already experienced the weaknesses of conventional methods. The Deputy Leader, Kim Nak-Sae admirably performed a supporting role in realizing the Leader’s dream by helping establish Sangju Donghak as a concrete institution.

Kim Nak-sae was born into a Yangban (upper class) family. He was also called Saesook, with the nom-de-plume of Ha-am. Born at Omi-dong, Poongsan-myon, Andong County, he was a 25th generation descendent of Moonjeok, a high-ranking official in the royal court of the Goryeo Kingdom. It is not known exactly why and how he joined Donghak, but he moved to Woogi-ri from his hometown of Andong to actively participate in the movement. Well-versed in the Chinese classics, he opened a school at the new settlement and was a teacher to many local young people.

In 1910, these two people formed a connection with each other. Kim Joo-hee lacked the funds necessary to begin construction on the buildings of the School. Well-acquainted with the terrain, Kim Nak-sae, a rich local, found an ideal place for the site and donated exorbitantly to the construction of the center.

On June 29, 1915, they broke ground on the structures. The work was soon followed by a framework-raising ceremonies for the North Wing on July 11, and for the West Wing on October 8 of that year. Kim Joo-hee’s dream was becoming a reality, but three more years were required before all the structures were completed. They had to wait another three years to open the school, however, until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granted them an official permit on May 29, 1922. It took them seven years in total.

In view of his role and status, Kim Joo-hee can be likened to the Founder Choi Jae-woo, and Kim Nak-sae to Jeon Bong-joon, the1894 Donghak revolution leader. In the traditional Confucian model, Kim Joo-hee was the householder of the School, while Kim Nak-sae assumed the role of the household manager. The deputy leader took efficient care of all the affairs of the School. Twenty years later, in the 1940s, when the School was severely oppressed by the Japanese, the Leader Kim was released on sick bail, but the deputy leader died on the rack. It is not difficult to understand why the deputy leader was tortured to death; as the actual manager of the School, he knew the school like the palm of his hand.

In reality, Kim Nak-sae was involved in all the important affairs, getting the school officially sanctioned, the construction of the School buildings, the secret printing of Scriptures and Songs, the mission work and the education of followers. Specifically, his ability to increase the number of followers, thereby expanding the influence of the School, was crucial. He employed a screening system for the followers, requiring referrals from existing members. There was a reason that Woogi-ri, where the School compound lies to this day, was also called ‘Andong Village.’ Many people from Kim’s hometown Andong moved there under the influence of Kim Nak-Sae.

That seems to have been the result of compounded effect wrought by regionalism, family ties, and academic sectionalism. Kim, Nak-sae, a well-known scholar himself in the area, skillfully took full advantage of these factors in expanding the influence of Sangju Donghak.

Kim Nak-sae’s another noteworthy achievement were his diaries, written in his own hand. The 17 volume set has been likened to a time capsule that contains all the affairs for the past 70 years. Some parts that are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have been translated in the past decade, but the information this has revealed is only the tip of the iceberg.

No one can tell what amazing or astonishing facts will be unearthed when these mysteries are finally penetrated.

Until last year, the unveiling process seemed like it would be completed in three years. But the possibility has gone for now. The Office of Gyeongbuk Province recently cut the budget for ‘the Translation Project for Kim Nak-sae’s Diary.’

The reason was that there is a new head of the department in charge of the project. Where can we find some ‘continuity of administrative affairs’? Everyone must yield to an incident beyond control, but few would agree with this official’s decision to completely eradicate the budget.

Let’s ask, “Is this the proper behavior for an administrator of the Gyeongbuk Province, which likes to call itself ‘a Window into the Traditional Korean Spirit’ or ‘the Treasury of Korean Culture?’”

Remainders (2)

‘To save the country was the common purpose, but the methods to attain the goal were different.’

The story of Sangju Donghak ? the Frontier Donghak ? is an example of such a case. There are three reasons for naming the subtitle of this story as ‘the Frontier Donghak’.

First, outwardly, the writers of our history are apt to ignore the existence of Sangju Donghak and leave out the valuable achievements of the School.

Secondly, Cheondogyo (“gyo” means a religion) insists that their order is legitimate as they have inherited and kept the orthodoxy of Donghak. Cheondogyo still refuses to recognize Sangju Donghak as an offshoot from the same roots. For these two reasons, Sangju Donghak cannot help being regarded, perhaps falsely, as a heterodox far away from the central region.

And thirdly, the term ‘Frontier Donghak’ has been introduced to emphasize its significant relationship with ‘Core Donghak.’ If we deny this argument, the word ‘frontier’ only means a geographical fringe area. But as far as Donghak is concerned, ‘Frontier’ cannot be denied its right to the history of the Core or the Orthodox Donghak. In other words, the history of the Core Donghak as the dominant branch may well be objectively quested. American historian Frederick Jackson Turner said, “An objective approach can feature a new fact in a different angle.” There is every possibility that some novel approach would bring out quite a fantastic, invaluable result.

When we look at “Core Donghak, we are surprised to find what we have overlooked, or what we haven’t recognized about the truth of Donghak. The story of Sangju Donghak is believed to have provided a good opportunity to look into Frontier Donghak as well as Core Donghak, by bringing the activities of the two orders into light.

In fact, the existence of Sangju Donghak compensates for the missing parts of Donghak history in a broad sense. The history describes the Battle at Mt. Daedoon as the last resistance of the Donghak Farmer’s Uprising. On February 17, 1895, the allied troops of Japan and Josun (modern day Korea) were ordered to suppress ‘the last cabals of Donghak’ that sneaked into the mountain. The troops attacked their hiding place at five AM the next morning. There were three humble, thatch-roof cottages surrounded by big rocks on three sides. There, twenty-six farmer militiamen, including a boy and pregnant woman in her late twenties, made a last stand against regular troops armed with modern weapons. The force killed all the resistors except the boy. The attackers hailed three times. “Long live the Emperor! Long live the Emperor! Long live the Emperor!”

Sohn Byong-hee, the third generation Leader of Donghak, had silently led an independent movement with the surviving followers, until he stood at the front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By the time Sohn and his followers reappeared as the spearhead of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the Frontier Sangju Donghak had already settled down and successfully expanded its influence in the area.

The prosperity of the School continued for almost 20 years until November 1943, when the Japanese changed their policy towards Sangju Donghak and cracked down the leaders and followers. Until then Sangju Donghak had strived for one goal: to make a happy world where all people were equal and united under the doctrine presented by the Founder, Choi Jae-woo. They knew they had to be prudent to survive in those turbulent times. Every step of their religious activities was carried out in strict secrecy, lest the Japanese smell anything suspicious. The Sangju people continuously produced copies of the Scriptures and Songs to educate the people and promote the welfare of the mankind. The printing of these copies secretly was one of their most sacred activities. The immediate charge against the people was that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propagation and practice of Donghak instead of worshiping the Emperor of Japan.

Sangju Donghak has kept more than 289 original types of artifacts from this period, and 1,400 total. Yet still the School remains ‘Frontier.’ Why is that? Is it because history has overlooked its existence, or intentionally depreciated its value? In fact, the School has been working in a remote, secluded valley, maintaining its slender existence for so many years with no direct connection to outside world.

Cheondogyo (天道敎), now the official term for ‘Core Donghak,’ still does not regard Sangju Donghak as its sibling, because, most Cheondogyo followers believe Kim Joo-hee, the Leader of Sangju Donghak, explained the philosophy of Choi Jae-woo, the Founder, in a different way.

Is it correct that Core Donghak has faithfully followed the philosophy presented in the Great Book of Donggyeongdaejeon and the Book of Yongdamyoosa, while Sangju Donghak has not? If there are slight differences between doctrines, can this justify the decision to disown Sangju?

In fact, there was another Donghak Movement, though there are not many who remember it: the Gapjin People’s Meeting Movement in 1905. After the execution of the Founder, Choi Jae-woo, Sohn Byong-hee, the third generation Leader, escaped to Japan to avoid arrest. He formulated a plan to reshape Donghak, or at least dress it in new clothes. ‘The Modernized Donghak’ was the result. On the basis of this new idea, the reformer organized ‘Jinbohwoe’ (Advanced Society).

On October 8 of that year, approximately 300,000 people in 360 villages and towns throughout the country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to instigate the people to wear western-style suits and to cut off top-hair knots (the traditional Korean adult male’s hair style). The movement took place in the year of Gapjin by the lunar calendar, hence it is called the Gapjin Civilian Movement. But Cheondogyo named it differently. They called it the Gapjin Reformation Movement, for, according to the organizers, the campaign was initiated by Cheondogyo in order to reform people’s consciousness.

Sohn Byong-hee, the advocate of the movement, explained its purpose,“Together with Japan, we will defeat Russia, then we can have sovereignty over our country by renovating the political system. That is the way for our country to recover.”

Doesn’t it sound irrational that the Leader of Donghak teamed up with the same Japanese who brutally suppressed Donghak by force? Again Donghak experienced trouble for its leading role in organizing the Gapjin Civilian Movement. A key Donghak leader named Lee Yong-gu was persuaded to cooperate by the Japanese government. He became pro-Japanese.

In the meantime, returning to Korea from Japan, Sohn Byong-hee, the Leader, changed the name of Donghak to Cheondogyo (天道敎), or Heavenly Truth, openly declaring the School to be a religion. He set up a central command headquarters and expelled a total of 62 pro-Japanese Donghak followers, including Lee Yong-gu. The expulsion of those people was not because of their betrayal of the Donghak principles, but was a strategic maneuver to tide over the current crisis. Most people interested in Donghak thought Donghak was different from Cheondogyo, as they couldn’t understand the rapidly changing ideas of the age. Taking all these historical factors into account, it is possible to begin to decipher the mysteries of Sangju Donghak. Just as a highway has several lanes, there are a few different ways to interpret the principles of Donghak. Likewise, as long as Sangju Donghak has preserved and spread the traditional doctrines of Donghak, what other name can we call it beside Sangju Donghak?

Had the followers of Sangju Donghak intended to set up a new order, they wouldn’t have maintained the title of Donghak. Had they had any different ideas from the teachings in the great Books of Donggyeongdaejeon and Yongdamyoosa, they wouldn’t have respected and kept the Scriptures in such esteem and obedience. It is time for us to reflect on ourselves whether we are more inclined to take advantages of the variants of the times, not as a means of tolerance but as a handy tool to use in seeking our own benefits.

Two things should be emphasized as the end of these remainders. Sangju Donghak has a right to be called part of the original Donghak. They survived all the difficulties while retaining many precious Donghak artifacts and traditions, as the living witnesses can testify. These priceless relics will serve an invaluable purpose as sources for the further study of Donghak, as they have retained the essence of Donghak practice and life. The studies have been done so far on Donghak and Sangju Donghak are just scratching the surface. It is this renewal of focus on the “Easter Study” will pave the way for a new spiritual era of traditional Korean values.

Written by Sim, Ji-hoon, Editor in Chief of Hangook Contents Institute

The Inscription by Haejong Yoo, Young-hee.

Translated by Kim, Heedal & Hwang, Yongsoo (Ph.D.) at LIKE TEST PREP (www.likestud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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