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가진 시인·비장애 예술가 교감...시 낭송하면 물감 묻힌 발로 탱고 춰
28일까지 영등포아트홀서 작품 전시
뇌성마비 시인과 탱고 페인팅 아티스트가 뭉쳤다. 시와 춤, 그림을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공연도 드물지만, 장애를 가진 시인과 비장애 예술가가 교감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무대를 선보인 것은 사실상 국내에서 처음이다.
25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아트홀 2층. 뇌성마비 시인인 이순애(58)씨가 ‘아이의 골목’과 ‘만남’이라는 시를 낭독하자 뒤이어 탱고 페인팅 아티스트인 정치훈(32)씨가 여성 파트너와 함께 음악에 맞춰 가로 5㎙, 세로 1.6㎙의 대형 흰색 캔버스 위에서 탱고를 췄다. 붓을 대신한 그의 발은 캔버스 위에 한 폭의 추상화를 완성시켰다. 정씨는 발에 물감을 묻혀 탱고를 추면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국내 유일의 탱고 페인팅 아티스트다.
이날 즉석 공연으로 제작한 그림 외에 정씨는 ‘아이의 골목’과 ‘만남’을 각각 형상화한 두 편의 그림을 사전에 제작했다. 이씨의 음성으로 녹음한 ‘아이의 골목’은 100번 가량 들으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감을 바탕으로 손과 발을 이용해 그린 추상화 제목이 ‘소녀의 꿈’이다.
‘마루가 세상 전부인 아이가/혼자 마루 끝에 앉아/햇살과 장난치며 놀다’로 시작하는 시는 어릴 적 몸이 불편해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였던 시인이 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의 세계를 갈망하는 내용이다.
정씨는 “어릴 적 호기심은 많았지만 집에 손님이 오면 방으로 들어갔다가 손님이 가야 밖으로 나올 정도로 소심했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며 “보이지 않은 세계에 대한 갈망, 꿈 그리고 실제로는 갈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아픔 등을 춤과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만남’이라는 시에서도 둘은 교감했다. 이씨는 올 초 남산에 처음 갔을 때 느낀 것을 시어로 풀어냈다. ‘시원한 산 오름길/달려 나가니/봄의 수채화/절정이다’
그는 “복잡한 시내, 오르막이 있는 산은 갈 수 없다고 스스로 제약했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용기 내 도전하고 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고 그 때의 벅찬 기분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정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코스타리카로 처음 배낭 여행을 떠났는데 낯선 곳이라 두려움이 앞섰어요. 그런데 막상 땅에 발을 딛고 나니 굉장히 설레더라고요. 그 때 느꼈던 감정과 시에서의 감정이 흡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객들에게 이들 작품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정씨는 “우리끼리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통해 관객들도 고립 속에서 꿈꾸는 희망, 갈망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만남’을 토대로 만들어진 추상화 앞에는 앉아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휠체어를 갖다 놓았다. 이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배려해서다.
작품은 25~28일 나흘간 영등포아트홀 전시실에 전시된다. 시 낭송을 들은 뒤 춤을 추며 직접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공연은 25일에만 있었다. 전시회는 한국뇌성마비복지회가 뇌성마비 시인들의 역량을 키우는 차원에서 기획했다. 다른 뇌성마비 시인과 비장애 아티스트들의 협업 작품도 볼 수 있다.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