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정리하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냉장고 문을 열고 구석구석 살펴본다. 유통기한이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요구르트, 말라서 쭈글해져 가는 사과. 굳어 있는 머스타드 소스, 시금치와 양파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우유도 주스도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세 달이나 지난 라면과 일 년이 훌쩍 넘어 있는 김을 보며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챙기지 못할 정도로 내가 바빴는지, 무신경 했었는지 한숨이 나온다.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도 살펴보았다. 개봉한지 6개월 만에 다 쓰기를 권장하는 마스카라는 아직도 있고, 9개월 안에 써야 한다는 로션들은 이미 기한을 넘겼다. 책장에 꽂힌 책들에도 눈이 간다. 책에 유통기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야심차게 읽어보겠다고 장만했던 책들이 구석에서 먼지를 가득 머금고 있다. 열심히 읽어 보리라 기대에 부풀었는데 책이 배달되어 오는 1, 2일 사이에 이미 그 열정이 식어버린 것이다. 책의 유통기한이 아니라 내 관심의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것이다.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다. 슬픔이나 고통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 기억에서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강렬하게 뇌의 편도체를 자극시킨 기억들, 괴롭고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들은 불현듯 찾아와 우리를 괴롭힐 때가 많다. 이전의 경험들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난 감정들인데 버릴 수 없어 괴롭다고 이야기 한다. 쉽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막상 감정과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슬픔에도 유통기한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하는 학생이 있었다. 가족이 헤어지고 힘든 상황에서 자라 마음이 항상 슬픈데, 이런 슬픔들도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한다. 지금도 힘든 마음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다고 하지만 어떤 기억과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간다. 단지 덜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고통이 있음에도 다른 즐거운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좋아하고 잘 맞았지만 어느 순간 서먹해지고 어색하고 단점들이 눈에 보여 멀어지게 되면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유통기한이 너무 빨리 와서 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친해질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유통기한’이라는 단어는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사람 사이란 것이 그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날 수도 없고 기한이 지났다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유통기한이 너무 짧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대상항상성은 아이들이 성장하고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음의 단계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를 사랑해주는 엄마와 나를 야단치는 엄마가 결국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 이미지를 내면화해서 안정적인 심리 발달을 이루는 것이다.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그 자체가 마음에 담겨지게 된다. 어린 시절 발달과정에서 대상항상성이 형성되지 않으면 이후 어른이 돼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안해진다. 좋을 때는 천사처럼 그 사람을 칭찬하다가 조금만 자기와 맞지 않으면 또 그렇게 비난하게 된다. 그러니 한 사람 속에 있는 여러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 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상대방이 널뛰듯이 변하게 되어 믿을 수 없는 사람, 나를 배신하는 사람들만 주위에 가득 차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면만 있을 수는 없다. 좋은 면과 마음에 들지 않는 면 모두를 가지고 있고 둘 다를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물건과 음식들을 정리하면서 다음에는 소중하게 챙길 수 있기를 다짐한다.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 감정과 추억들을 떠올리며 모든 관계에서 좋은 모습, 나쁜 모습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는 유통기한이 없다는 것을 되새겨본다.
박은진 인제대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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