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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디아스타제와 엿, 그리고 수능의 미래

입력
2014.11.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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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타제’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각종 식물에 널리 함유돼 있으며, 동물의 간, 침 등에도 포함돼 있는 전분당화효소(澱粉糖化酵素)라고 한다. 쉽게 말해 녹말을 분해해서 포도당으로 바꾸는 효소다.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쓰임과 특성에 대해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치르던 1964년. 서울 지역 중학교 입학시험에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출제됐는데 그 답이 바로 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일부 학부모들이 보기 중에 있던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됐다. 무즙에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 있으니 마찬가지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즙을 답으로 찍어 낙방한 학생의 어머니들은 소송을 제기했고, 직접 무즙으로 만든 엿을 들고 “엿을 먹어보라”며 서울시교위(현 서울시교육청)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욕설로 간주되는 ‘엿 먹으라’는 말이 이 ‘무즙 파동’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결국 이듬해 법원이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38명의 학생이 경기중 등 이른바 명문 중학교에 추가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합격과 불합격이 시험 문제 하나로 결정되는 교육 현실도 씁쓸하지만, 그 문제가 ‘엿에 무엇을 넣느냐’라는 건 지금 봐도 허탈할 뿐이다. 과연 당시 학생들이 이후 인생을 살며 ‘디아스타제와 무즙으로 엿을 만들 수 있다’는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옛날 이야기로 웃어 넘길 수도 있겠지만 우리 교육에서 시험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누가 더 잘 외우느냐의 암기력 싸움. 등수를 매겨 탈락자를 가려내기 위해 ‘배배 꼬인’ 문제로 학생들을 골탕먹이는 시험.

그러다 19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등장했다. 단편적 교과 지식을 묻던 학력고사로는 바뀐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어렵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기본개념과 원리를 바탕으로 학생들의 사고력, 논리력을 측정하겠다는 취지였다. 교과서 밖에서 문제가 출제됐고, 수리영역 문제 중엔 정치경제, 지리, 세계사의 지식을 적절히 활용해야 풀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교과서만 달달 외우거나 정답을 골라내는 요령을 익히는 ‘찍기 학습’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어 보였다.

그랬던 수능이 올해로 21년째를 맞았다. 암기 위주의 문제풀이식 학습 행태는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입시 전문가들은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면 EBS 영어 교재에 나오는 지문의 한글 해석을 암기하라”고 주문한다. 학생들은 교과서도 아닌 EBS 교재를 경전 삼아 문제 푸는 기계가 됐고, 교사들은 문제풀이의 도우미 신세다.

누가 봐도 비정상ㆍ비교육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말끝마다 학생의 창의력을 강조했던 정부다. 사교육을 잡겠다며 수능 문제의 70%를 EBS 교재에서 내도록 하고, 영역별 만점자 비율을 1%에 맞춰 쉽게 출제하도록 한 것은 이명박정부였다. 사교육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어떻게든 줄여보겠다는 취지였지만 견고한 학벌 구조, 극심한 취업난, 경쟁을 조장하는 시스템,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내려는 학부모들의 욕망 등 뿌리깊은 문제들을 놔두고, 입시 방식만 ‘살짝’ 바꿔 사교육 문제 해결을 기대한 것은 순진하면서도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후 교육 현장과 입시제도 모두 엉망이 됐지만 사교육이 줄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자격고사화 해야 한다거나 아예 없애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으니 수능 제도는 이제 한계점에 온 것 같다. 변화가 불가피할수록 교육의 본질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며,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이 배운 것은 어떤 틀로 평가할 것인지….

과거처럼 사교육 절감, 교육격차 해소, 공교육 정상화 등 특정 정책을 실현하고자 입시를 바꾸는 얄팍한 잔기술을 쓰면 안 된다. 입시는 입시 자체로 고민하는 것이 맞다.

한준규 사회부 차장대우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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