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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미생’의 그녀들

입력
2014.11.1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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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생’에는 어느 일터에나 꼭 있을 법한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캐릭터들의 성격도 단순하지 않아 밉살맞다가도 연민이 느껴지는 등 다양한 감정반응을 불러내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반면 여성 캐릭터는 딱 네 가지로 정형화돼 있다. 여자라는, 더 정확히는 ‘잘난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구박을 받는 신입사원 안영이,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워킹맘을 대변하는 선 차장, 합리적 일 처리와 못난 외모가 늘 대비되는 재무부장, 그리고 마초남들의 성희롱에 시달리는 여직원들. 철저히 타자화(他者化)된 여성 캐릭터가 불편하고, 그게 극적 과장만은 아니어서 더 씁쓸하다.

▦ 고용노동부와 한국고용정보원의 성차별적 ‘면접 모범답안’ 파문은 일하는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희롱에 대해 물으면 “성에 대한 가벼운 말 정도면 신경 쓰지 않겠고, 농담으로 받아 칠 여유도 필요하다”고 답하란다. “지나치게 예민”해 보이지 않게 “도량을 넓혀 말하라”는 깨알 같은 주문도 덧붙인다. 그 조언대로 “한잔의 커피도 정성껏 타겠다”, “결혼 계획(따위는) 없다”고 당당히(?) 답하고서야 겨우 바늘구멍을 통과한 이들의 미래가 곧 ‘미생’의 그녀들이라면 지나칠까.

▦ 무슨 일을 시키든 어떤 일을 당하든 고분고분해야 살아남는다고 일러주는 ‘면접 모범답안’을 들춰보면, 일터에 만연한 성희롱ㆍ성추행 역시 지독한 성차별에 기반한 권력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국회의장을 지낸 저명 정치인, 검찰총장 출신의 골프장 회장 등 최근 불거진 성 추문의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고용불안에 떠는 이들이었다. 인권의 보루라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조차 직원 성추행 사건을 은폐하려는 만행이 벌어졌다.

▦ ‘미생’의 그녀들이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주변부 캐릭터가 아니라 일터의 주역으로 당당히 서는 날은 언제일까.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지만, 사회적 인식과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짓궂은 장난과 성희롱ㆍ성추행, 혹은 차이와 차별을 도무지 구분 못하겠다는 까막눈들에게 조언한다. 당신의 배우자나 애인, 자녀가 당한 일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면, 당신 역시 남의 배우자ㆍ애인ㆍ자녀를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된다. 같이 살고 같이 웃자.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tvN 드라마 '미생' 캡처화면.
tvN 드라마 '미생' 캡처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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