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의 기무라 다다카즈 사장이 지난 14일 결국 사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착잡한 심경이 들었다. 지난달 16일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일미래포럼이 주최한 ‘한일언론인포럼’ 참석을 위해 도쿄를 방문한 한국 기자들을 반갑게 맞이할 때만 해도, 내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아사히신문의 역할을 찾겠다며 적극적 의지를 밝혔던 그였다. 그의 사임은 직접적으로는 지난 8월과 9월에 잇따라 시인한 두 건의 대형 오보, 즉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요시다 증언’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관련 오보 책임에 따른 것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일본 보수 측의 총공세에 손을 들고 만 격이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일본 내 지한파(知韓派)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어서 가뜩이나 악화한 한일관계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 보인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일본 내에서 위안부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며 공론화시킨 언론이 아사히신문이었다. 1982년의 요시다 세이지 증언이야 그간 학계에서도 신빙성이 의심된 것이었지만, 아사히가 1990년대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발굴한 일본군 문서를 특종 보도한 내용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다. 당시 문서로 일제 시대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과 군 위안소 설치와 운영에 관여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1993년 고노담화 발표로 이어졌다. 일본의 대표적 진보 언론이자 지한파인 아사히의 존재가 한일관계에 단비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퇴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지금 일본의 지한파는 우파의 대공습에 날로 목소리가 위축되는 모습이다. 아사히의 오보 인정이 일본 보수파에 의해 위안부의 강제성 자체를 부인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지면서 일본 저변의 기류도 험악하다. 과거 위안부 기사를 보도했던 전 아시히신문 기자는 우익의 협박으로 대학 강단에서 쫓겨날 위기에도 처했다. 지난달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기무라 사장은 “한국 때리기 분위기가 상당히 고조돼 있고, 혐한 염한 등 듣기 민망한 말들이 일부 일본 젊은이들에게 퍼지고 있다”며 우려했다. 이런 분위기로 편집국장에 이어 사장까지 교체된 아사히신문의 논조마저 퇴행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한파의 입지가 축소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의 사회 경제적 변동과 그에 따른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1차적 원인을 찾아야 할 터다.
그러나 그 지한파들이 한국에 대해 답답함을 털어놓는 대목은 우리로서도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가깝게는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풍문'에 대해 칼럼을 쓴 산케이신문 전 서울 지국장 기소 건이다.“(일본 내에서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칼럼인데 한국 정부가 기소하는 바람에 주목 받았다. 산케이가 언론 자유를 대변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한 언론인의 하소연 앞에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검찰의 어처구니 없는 ‘대통령 심기 경호’는 더 논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산케이기자 기소건이 일종의 돌출적인 막간극이라면, 보다 세심한 성찰을 요하는 질문은 따로 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하지만, 고노담화ㆍ 무라야마담화ㆍ아시아여성기금 등 그간 일본 정부가 보여준 노력은 성의 있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다. 이른바 ‘사과 피로증’이다. 일본이 지난 20여년간 위안부 문제를 풀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에 대해 한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이는 평균적인 일본인 뿐만 아니라 지한파에 속하는 일본인들마저 느끼는 피로감이다.
이에 대해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국가범죄로 인정하고 법적으로 배상하면 된다는 게 지난 20여년간 우리의 정답이었다. 그러나 이 ‘근원적 해법’은 일본이 천황제를 폐지하는 등 전후 체제를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일본인 다수에 받아들여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근원적 요구가 결과적으로 일본 우파의 역류를 불렀다는 일각의 분석에도 이제 귀를 기울여 볼 차례인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질문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민감한 지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 소송 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 소송 건을 이런 논의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송용창 정치부 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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