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이는 내가 살고 있는 거문도의 거문초등학교 본교 3학년이다. 이름에 동녘 동(東), 밥 식(食)자를 쓴다. 성명에 食자를 쓴 경우를 나는 처음 봤다. 출산 뒤 엄마 꿈속에 할머니가 나타나 꼭 그 글자를 넣으라고 일렀단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현몽을 하면 좋은 일이 자주 있었기에 그렇게 했다. 이름 때문인지 밥을 엄청 잘 먹어 엄마 아빠를 흡족하게 했는데 요즘은 배가 불쑥 나와서 되레 걱정을 할 정도이다. 식사 시간에 간혹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어어, 내 밥이 자꾸 줄어들고 있어.”
본교 3학년은 동식이 한 명이라 학년 일등은 맡아 놓고 한다. 작년에는 이등이었는데 한 명이 전학을 간 것이다(그래도 이번 중간고사에서 과학은 95점을 맞았다, 고 담임이 전해주었다). 이 말은 동갑 친구가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옆집 6학년 누나, 합반 수업을 하는 4학년 형, 그리고 1학년 후배 두 명이 유일한 친구이다. 합쳐봤자 서 너 명 밖에 안 되는 것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논다. 최근에는 S형 보드를 사서 곧잘 타고 다닌다. 마을에 코딱지만한 체육관이 있다. 엊그제는 그곳 러닝머신 위에서 굳이 보드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나한테 한소리 듣기도 했다.
그는 곧 다가올 학예회 때 합창단 지휘를 맡는다. 학교에서 임대한 지휘자 복장을 우연히 구경했는데 넉넉한 몸집에 까맣고 기다란 옷이 잘 어울려 근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덕에 음정을 잘 못 맞춰서 지휘 쪽으로 갔다는 소문이 사라졌다. 나도 그 소문은 믿지 않았다. 동식이 엄마는 섬에서 알아주는 가수니까.
일전에 내 독자들이 단체로 찾아오는 행사가 있었다. 이런 경우 그들을 데리고 산을 타야 하고 가두리 양식장에서 낚시도 해야 한다. 그러나 스무 명이나 되기 때문에 혼자서는 그걸 잘 해내기가 무리이다. 그래서 동식이에게 부탁했다. 동식이는 등대까지의 가이드를 자처했으며 낚시할 때는 최소 세 명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낚시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미끼를 끼워주고 입질이 왔을 때 채는 방법, 릴 사용하는 요령은 물론 잡힌 물고기를 빼주는 조력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식이는 모든 것을 잘 해냈다. 등대까지 걸어가는 동안 지명의 유래, 이런저런 나무와 꽃에 대해서 아는 만큼 설명해주었고 쉬는 시간과 출발 시간을 스스로 판단했다. “자 이제 그만 가죠.” 그가 한 마디 하면 스무 명 손님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가 선택한 세 명의 손님은 일행 중에서 가장 젊은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에 대해서도 끝까지 책임을 졌다. 땡볕 아래서 일일이 낚싯대를 펴주고 배고파하면 생선구이도 날라주고 술병도 가져다 주었다. 아침에는 숙소로 찾아가 그녀들이 나오기를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덕분에 그 대상에 들지 못한 ‘묵은데기 아줌마’들은 탄식을 해야 했다. 우리도 좀 돌봐달라고 애원을 할 정도였는데 끝내 못들은 척 한 탓에 그녀들은 가버린 세월을 떠올리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문제는 이별. 그 동안 손님들이 찾아와 함께 잘 지내다가도 헤어지는 시간이 되면 동식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여름이면 한번씩 놀러 오는 내 조카와도 아주 친하게 지냈는데 헤어질 때는 절대 배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아 간대” 이러면 손 한번 쓱 들어서 “잘 가라 그래” 하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거나 멀리 놀러 가버렸다. 그래서 손님들마다 “어, 동식이 안보이네” 소리를 하게 된다.
여객선이 떠나고 나면 문득 밀물처럼 밀려오는 허전, 공허, 쓸쓸함, 이런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헤어지는 모습이 거창하고 클수록 그 다음 찾아오는 상실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일행들이 여객선 타려고 할 때 처음으로 그가 나타났다. 세 명의 누나들과 포옹을 하고 선택 받지 못한 아줌마들과도 비로소 악수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짧은 순간 그러고 나서 휙 사라져 버렸다.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별을 밥 먹듯이 한다. 그럴 때마다 생기는 서운한 감정은 어린 초등학생까지도 이렇게 예외가 아니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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