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곱던 단풍잎이 바람에 날려 길에 뒹굴고 있다. 왠지 몸이 스산한 것은 날이 차서만은 아닌 듯하다. 따뜻한 정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쓸쓸하다면 고운 단풍잎 하나 주워서 짧은 글 하나 써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면 어떨까 싶다.
서영보(徐榮輔)는 1806년 가을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명찰 장안사(長安寺)에서 묵으면서 벗 이만수(李晩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공께서도 내가 금강산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겠지요. 공도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겠구려. 이에 등잔불 앞에 나가서 눈을 비비고 이렇게 편지를 써오. 금성에 계신 당숙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보낼 터이니, 편지가 도착하여 열어보면 한 바탕 슬픔이 일겠지요. 금강산은 풍악이라고도 부르니, 붉은 단풍잎이 이 때문에 절로 더욱 곱소. 한 가지 꺾어 편지에 넣어 보내오. 이를 보시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모두 이 단풍잎으로 덮여 있음을 멀리서도 알 수 있겠지요.” 함께 금강산 구경을 가지 못한 벗에게 단풍잎에다 시를 쓰고 편지에 넣어 함께 보낸 것이다.
이때 이만수는 함경도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다. 그 역시 그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벗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운치 있는 벗의 편지를 받고 막 짓고 있던 누각 이름을 홍엽루(紅葉樓)라 하고 또 홍엽첩(紅葉帖)이라는 이름의 시집을 엮었다. 이 시집은 서영보가 보낸 단풍잎과 편지에다 자신의 시를 보탠 것이었다.
서영보는 평안도의 묘향산을 유람하고 있던 또 다른 벗 김조순(金祖淳)에게도 같은 시집과 단풍잎을 보내었다. 이 단풍잎은 서영보가 이만수에게 보낸 것과 같은 가지에 붙어 있던 것이니, 세 사람의 우정을 이렇게 표한 것이다. 김조순은 이 단풍잎을 연적 상자 안에 넣어두고 대신 홍엽첩에는 단풍 모양 그대로 모사해서 그린 다음 발문을 지어 다시 보내었다. 그리고 “붉은 단풍 가지 잡고 가을 든 묘향산 올랐더니, 금강산 놀러간 죽석관 노인이 그리워지네. 이 단풍잎 지금 눈물로 감싼 것인데, 누굴 시켜 벼루에 넣고 누각 이름으로 삼게 하였나?”라는 시를 지었다.
벗에게 단풍잎과 함께 시집을 보낸 후 서영보는 이 시집 앞에 서문을 적었다. “마음은 몸을 부리는 존재다. 마음에 묘한 것이 있어 말로 하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 신이 운용될 때에는 순식간에 움직이지만 털끝처럼 작은 것도 포괄한다. 잡아도 그 단서를 헤아릴 수 없고 살펴도 형체나 소리를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신이 응집된 것은 기약하지 않아도 이르고 맹세하지 않아도 믿음직스러우며 말하지 않아도 깨우친다. 사랑은 부모나 자식보다 독실한 것이 없겠지만 서로 깊이 사귄 벗이 오히려 더 친밀하니, 곧 정신이 모인 신회(神會)이기 때문이다.” 서영보는 혈연의 만남보다 벗과의 정신의 만남이 오히려 독실하다 하였다.
삭막한 세상 단풍잎을 두고 호들갑을 떤 이런 우정이 그립다. 혹 남녀의 사랑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더욱 붉은 단풍잎이 소중하다. 붉은 단풍잎에 시를 쓴 일을 두고 애틋한 사연이 전한다. 당나라 때 궁녀 한씨(韓氏)는 “흐르는 물 어이 그리 급한가, 구중궁궐 하루 종일 한가하기만 한데. 은근히 붉은 단풍잎 흘려보내니, 인간세상으로 잘도 가거라”라는 시를 써 대궐의 개울에 흘려보냈다. 우연히 우우(于祐)라는 사람이 이 단풍잎을 보고 답하는 시를 다른 단풍잎에 적어 대궐 상류의 개울에 띄워 보내었고 궁녀가 다시 이를 보게 되었다. 훗날 궁녀가 대궐에서 나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남편이 우우였다. 기이한 인연을 두고 한씨는 “한 구절 아름다운 시가 개울 따라 왔으니, 십년 세월 남모를 시름이 가슴에 가득했지. 오늘에야 봉황이 짝을 이루었으니, 붉은 단풍잎이 중매 잘 한 줄 이제야 알겠네”라 하였다. 청춘의 남녀가 단풍잎에 쓴 시를 매개로 하여 가연을 맺었던 것이다. 혹 가연을 맺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먼저 단풍잎에 글을 지어 보내면 단풍잎이 중매의 신이 될지도 모른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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