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단의 경합범" "경료되었다" 어려운 법률용어들 버젓이
시민 "한 번 읽고 이해" 6.5%뿐, 내년 온라인 공개… 개선책 절실
내년이면 형사ㆍ민사 사건 구분 없이 판결이 확정된 모든 사건의 판결문이 온라인 상에 공개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증진시킨다는 차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문이 많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지난달 28일 생후 39일 된 아들을 학대해 숨지게 한 아버지에게 징역 2년6월 형이 선고됐다. 울며 보챈다는 이유로 아기를 3차례에 걸쳐 집어 던지고, 종이상자에 집어 넣은 뒤 이불로 덮어 1시간 가량 방치해 아기를 죽게 만든 비정한 아버지였다. 이 사건 판결문에는 양형의 이유로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과 형법 제37조 후단의 경합범 관계에 있는 살인미수죄 등으로 이미 징역 5년의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제37조 후단의 경합범 관계란 과거에 지은 범죄에 대해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그 판결 전에 저지른 또 다른 범죄에 대한 재판을 추후에 진행하게 될 경우를 뜻한다. 즉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이 사건 판결 전 살인미수죄로 처벌받은 점을 감안해 이번 범죄의 형을 줄여 준다는 내용이다. 양형 이유는 당사자와 국민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부분이지만, 이처럼 까다로운 법률용어로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힘든 판결문이 많다. 하현국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어려운 법률용어를 쉽게 풀어 쓰면 원래의 의미와 달라질 수 있어 조심해야 하지만 해당 용어를 쓰더라도 설명을 추가해 이해를 돕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사사건 판결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 7월 선고된 부동산 관련 사건 판결문을 보면 “주식회사 A은행은 채무자 B씨의 소유였던 서울 소재 아파트에 대한 근저당권자로서 이에 기하여 부동산 임의경매를 신청하였고, 2012년 2월 17일 임의경매개시결정등기가 경료되었다”고 나온다. 쉽게 말해 A은행이 B씨 소유의 아파트에 대해 담보권 실행을 위한 경매를 신청했고, 법원이 경매 개시를 결정해 등기를 마쳤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법원도서관이 발행한 ‘법원 맞춤법 자료집’에 따르면 ‘임의경매’, ‘경료되었다’는 표현은 각각 ‘담보권 실행을 위한 경매’, ‘마쳤다’로 고쳐 쓰는 게 바람직하다.
A4용지 1장이 넘어가도 끝나지 않는 긴 문장도 여전히 많다. 지난 1월 ‘카바수술’ 심장수술법을 만든 송명근 건국대 교수의 명예훼손 무죄 선고 판결문에서는 A4용지 2장이 넘는 문장이 발견됐다. ‘하였고’ ‘하기로 하고’ ‘되었고’ 등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무려 46줄에 달했다. 하나의 문장 안에 여러 개의 주어와 서술어가 들어가면 ‘누가 무엇을 했다’는 연관 관계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법원은 그동안 판결문을 쉽게 쓰기 위한 연구와 교육을 해 왔지만 관행으로 자리 잡은 어려운 판결문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 대구지법이 일반 시민 1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전에 판결문을 읽어본 적이 있다고 답한 62명 중 ‘한 번 읽고 쉽게 이해가 됐다’고 답한 이는 6.5%에 불과했다. 여전히 국민이 아니라 상급심 판사의 눈높이에 맞춰 판결문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권순형 대구지법 부장판사는 “1심 판사들의 경우 상급심에서 새로운 형식의 판결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대체로 기존 방식을 고집한다” 며 “전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개별 판사들이 과감하게 문체나 형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길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결국 법관의 인식, 습관의 문제”라며 “특강 등을 통해 계속해서 판결문 쉽게 쓰기를 독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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