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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해후(邂逅)

입력
2014.11.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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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이노 타이프 작동수로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타이핑을 대신 해주면서 일을 시작한 셈이다. 그런 탓에 지금도 작업은 라이노 타이프 작동방식을 쓰곤 한다. 컴퓨터에 익숙한 유령작가도 많다. 하지만 손에 익어서 인지 난 아직도 라이노 타이핑을 선호한다. 물론 원고를 넘길 때에는 타자기로 마무리 한 것을 랩탑에 다시 옮겨 친 후 출판사에 보낸다. 두 번씩 타자를 옮기는 셈인데, 유령작가로 지내다 보면 이쪽 것을 저쪽에 옮기는 일에는 금방 익숙해진다. 가끔은 저쪽의 삶이 이쪽으로 들어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글 쓰는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선배를 졸업 후 우연히 만나면서부터다. 가리봉동의 아파트 단지 내 동네 입시학원을 접은 대학 선배는 작은 출판사를 차린 후 내게 동업을 제안해왔다. 하릴없이 몇 개월 동네만화방을 전전하다가 벼룩시장광고를 보고 영등포에서 중등반 보습학원 강사로 지내던 무렵에 선배를 만나게 된 것이다. 2년 째 월급이 동결상태인 일이었고 따분한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대학졸업 후 7년 만에 3호선 지하철 역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요즘 뭐해?” “밥은 먹고 다녀.” “당구 칠래?” “아직도 당구야? 아는덴 있어?” “최근에 배웠어.”

월급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의 폴란드 시청에서 독일 장교 밑에서 일하는 여자 타이피스트 수준이었다. 레지스땅트처럼 암호나 문서를 빼돌리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일은 즐거웠다. 야근은 많았지만 무엇보다 보강수업은 없어서 좋았다. 조금씩 출판사 형편이 나아지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기획한 실용서도 출간했다. 이를테면 ‘길거리 고양이를 위한 밥상 만들기’ 같은.

십 년 만에 다시 우리는 3호선 지하철 역 계단에서 만났다. 연락은 해온 것은 선배였다. 출판사는 몇 년 전에 그만 두었다고 했다. 건물주가 디자인을 전공하는 딸아이의 작업실을 위해 건물을 오피스텔로 개조한다며 더 있고 싶으면 월세의 10배를 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건 나가라는 뜻이다. 선배는 권리금 한 푼 못 받고 쫒겨나다시피 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건물주가 밥을 먹고 하루 종일 하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월세를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존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새로 온 사람에게 자기가 권리금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도 아니면 세입자를 내 보낸 후 어떻게 가계의 간판만 바꾸어 자기가 운영해 볼까 하는 것 뿐이다. 이런식으로 그들은 몇 년 안에 동네에서 땅부자가 될 것이다. 선배는 술에 잔뜩 취해 화장실에 앉아 볼일을 보는 건물주의 문을 열고 소화기로 이마에 구멍을 내고 나왔다고 했다. 건물주는 머리를 싸매고 증거물로 똥물이 잔뜩 튄 소화기를 들고 경찰서로 달려 갔다고 했다.

멀리서 한눈에 봐도 선배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합의를 봐주고 나니 파산이 되었다고. 그 사이 코가 더 빨개졌고 행색도 노숙인 차림이었다. 여름인데도 겨울 점퍼를 거치고 있었는데 전에는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 정도만 참아주면 되었는데 이제는 5분 이상 가까이 있으려면 코를 잡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지경이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화장지로 콧구멍을 막은 채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좀 지내다가 입시학원 다시 해볼까 해.” “입시도 실패했잖아...” “내가 입시에 실패한 게 아니라 학생들이 실패한 거야!” “그게 그거야.” “넌 어디 입시학원 다녔니?” “난 최종학력이 여름성경학교야” “나쁜 자식. 입시학원도 안 다니고 대학을 붙어?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입시 학원이 망하는거야!” “형 취했어. 그만 가서 자” “알았어 새꺄. 자주 찾아와.”

선배는 남은 소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 후, 지하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가는 듯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자고 있는 옆 사람 한 명을 발로 밀치고 자신도 계단에 누웠다. 코 고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하철 마지막 정차방송 안내가 멀리서 들려왔다.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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