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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처럼 천천히… 유기농 처음 시작됐던 느림보 도시

입력
2014.11.0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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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ㆍ북한강 만나는 한강 시작점

수종사서 전경 본 조선 문호 서거정

"동방의 사찰 중 최고의 전망" 경탄

슬로푸드대회...유기농 테마파크...

도시인들에 건강한 음식 알리기

강변 걷거나 자전거 타기도 일품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북한강변에 조성된 유기농테마파크 전경. 국제 슬로시티로 거듭나고 있는 조안이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슬로푸드와 유기농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유명식기자 gija@hk.co.kr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의 북한강변에 조성된 유기농테마파크 전경. 국제 슬로시티로 거듭나고 있는 조안이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슬로푸드와 유기농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유명식기자 gija@hk.co.kr

물안개 하나로 사람을 불러 모으던 곳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만나는 강변 마을이다. 한강으로 합수되는 두 물줄기가 피워 올리는 고혹적인 물안개에 시린 마음을 달래고 상심을 위로 받으려는 이들이 새벽이면 찾아가던 곳이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앞에서 한강이란 이름의 물줄기가 시작되고, 아름다운 물안개가 뭉실 피어 오른다. 조안의 뒤편으로는 운길산 예봉산 등 높은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있다. 운길산 중턱의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조선의 문호 서거정이 “동방의 사찰 중 최고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경탄할 만한 풍광을 지녔다.

큰 물줄기를 끼고 있는 이 아름다운 고장은 서울에서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근접성과 자연환경 등은 분명 장점으로 여겨질 법한데, 하지만 이런 이유들로 조안은 오랫동안 정체돼왔다. 수도권 2,000만 시민의 식수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중삼중의 규제에 묶이는 바람에 산업화의 물결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공장은 꿈도 못 꿨고, 농사를 짓더라도 농약도 함부로 쳐서는 안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엄격한 규제 덕에 자연과 문화가 보존돼왔고, 이제 그 지켜온 것들이 자연과 친환경을 중시하는 트렌드를 만나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산임수의 지형에 산세와 풍광이 좋고 공기가 맑은 아름다운 강변마을은 지난 2010년 11월 영국 스코틀랜드 퍼스에서 열린 국제슬로시티 연맹이사회에서 국제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이렇게 조안은 수도권 최초이자 유일의 슬로시티가 됐다. 매사에 빨리빨리 정신만을 요구하는 효율 만능의 일상을 떨쳐버리고 자연의 속도에 맞춰 느림의 미학에 흠뻑 취할 수 있는 ‘느림보 도시’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개발의 욕구를 참아냈던 인내심과 기다림이 오랜 시간이 흘러 현명한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슬로시티 조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는 유기농업을 기반으로 한 슬로푸드다.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식문화운동인 슬로푸드는 패스트푸드를 거부하는 운동이다. ▦지역에서 나는 신선하고 맛있는‘좋은(Good) 음식’▦동물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깨끗한(Clean) 음식’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을, 생산자에게는 공정하게 보상하는 ‘공정한(Fair) 음식’이 기본 철학이다.

남양주시는 2009년부터 매년 슬로푸드대회를 열어 슬로푸드의 철학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농약을 무분별하게 사용할 수 없는 팔당호 인근에서 자란 친환경 유기농산물은 이런 슬로푸드 운동의 동력이다. 팔당 두물머리 일대는 우리나라 유기농의 발원지로 유명한 곳이다. 1976년부터 ‘정농회’라는 모임에서 두 세 농가가 유기농업을 시작했고 이것이 팔당호 주변으로 확산했다. 지난 정부 때 4대강 사업이라는 논리에 밀려 위기를 겪었지만, 명맥은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남양주시는 2011년 9월 394억원을 들여 유기농 테마파크를 만들고 패스트푸드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유기농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유기농을 주제로 한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는 부지 4만3,314㎡, 연면적 5,356㎡ 규모다. 이곳에서는 유기농의 역사와 원리, 가상공간을 통해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와 패스트푸드의 이면을 알아볼 수 있다. 김치 담그기와 비빔밥 만들기, 유기농텃밭 모델 교육, 땅콩 심기, 메주콩 심기 등 유기농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도 있다.

주변 먹거리도 풍부해 유기농 쌈밥, 연잎밥, 연잎 찐방, 연잎차 등의 슬로푸드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테마파크 측은 올해 다녀간 관광객만 지난달까지 17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조안의 매력을 제대로 보고 느끼려면 다산길을 따라가는 게 딱이다. 모두 13개의 코스로 짜인 다산길은 그 길이만 169km에 달한다.

특히 중앙선 전철을 타고 덕소역에서 내려 팔당역, 능내역, 운길산역까지 이르는 16.7km 구간의 ‘한강나루길’은 느림보 도시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전철역과 버스가 다니는 길을 잇고 있어 차 없이 배낭 하나만 둘러메고 다닐 수 있다. 북한강변을 끼고 펼쳐진 절경이 빼어나 걸어도 좋고 자전거를 타고 내달려도 그만이다. 늦가을 단풍을 머금은 강변을 따라가다가 봉안터널을 빠져나오면 추억의 능내역으로 들어선다. 기차가 오지 않는 능내역은 한동안 버려져 있었지만, 다산길이 생기면서 생기를 되찾았다. 거기에 주민들이 하나 둘씩 내놓은 추억의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는 고향사진관이 문을 열어 추억의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능내역 앞은 다산 유적지이다.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 수학하던 이곳은 팔당호를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비롯해 억새길, 숲, 연못 등이 어우러져 있어 마음이 절로 정갈해진다. 느리게 걸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는 즐거움이 있고, 천천히 키워진 유기농 먹거리에서 고마움을 느끼며 느림의 미학을 맛볼 수 있다. 휴가를 낼 필요도 없다. 반나절 여유만 가지면 ‘회색도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유명식기자 gij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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