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곰삭았다. 충남 보령에서 만난 계절 교차하는 풍경이 참 순하다. 한갓진 장밭마을 은행나무들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노란빛깔을 선보이는 중이다. 마을 뒤에 우뚝한 오서산은 하늘 맑고 시계도 좋은 늦가을, 너른 들판과 바다 조망하는 천연 전망대로 손색없다. 고즈넉한 절터에 들러 마음 살피고 호수 따라 산책하며 철새와 노닐면 가을 보내는 헛헛함이 달래진다.
● 노랗게 물든 한갓진 은행마을
청라면 장현리 장밭마을은 ‘은행마을’로 통한다. 조붓한 고샅길을 걸어도, 소박한 흙담 옆을 지나도 은행나무가 따라온다. 이러니 마을로 들어서면 만추(晩秋)의 서정 물씬 느껴지고 마음은 고향집에 온 듯 편안해지는 풍경이 눈앞에 나타난다.
빈집 포함 100가구 남짓한 이 마을에 은행나무가 3,000그루다. 열매가 열리는 은행나무(암나무)만 따져서 이렇다. 열매 열리지 않는 수나무, 열매 맺지 못하는 50년 이하 수령의 나무들까지 합하면 4,000~5,000그루는 족히 된다는 것이 이 마을 조구형씨(은행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사무장)의 설명이다. 2,000그루 이상만 되어도 은행나무 군락지로 이름 날리는 것 감안하면 4,000~5,000은 예사롭지 않은 숫자다. 수령이 500년 넘는 것도 10여 그루다.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으니 은행나무의 등장한 것은 이 무렵일 거다. 은행 열매가 몸에 좋다는 것을 알고 형편 넉넉한 사람들이 몇 그루씩 심기 시작했다고 조씨는 설명했다. 그런데 전설은 이와 별개다. 마을 뒷산이 까마귀가 많이 살았다는 오서산. 어느날 산기슭 어느 마을 연못에서 구렁이가 황룡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이를 본 까마귀들이 어디선가 은행나무 열매를 여의주로 여겨 이를 물고와 마을에 심고 정성껏 키웠단다.
이렇게 자란 은행나무에서 해마다 100톤 이상의 열매가 열린다. 상품 가치 떨어지는 ‘잔 것’까지 합하면 200톤은 될 거란다. 열매 내다 팔고 가공식품 만들어 파는 수입도 꽤 된다.
은행나무 단풍이 입소문 타면서 때를 기다려 일부러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마을 사람들은 2km에 걸쳐 마을 에두르는 ‘은행나무 둘레길’ 만들고 2012년부터 축제를 열었다. 둘레길 걷다보면 골목 모퉁이에서 닭과 오리도 만나고 오후 볕 내려앉은 정갈한 흙담도 볼 수 있다. 마을 가로질러 시냇물도 ‘졸졸’ 흐른다. 노란 단풍이 드리워진 한갓진 시골마을 음미하면 곰삭은 가을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 든다.
마을 한가운데 신경섭가옥 주변은 백미다. 신경섭가옥은 조선 후기 모습을 간직한 고택이다. 오래된 마당 주변에 1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가득하다. 바닥에 뒹구는 낙엽도 우아하다.
올해 은행마을 단풍 축제는 지난 2일 끝났다. 현재 70% 이상 단풍이 남았다니 이번 주말까지는 단풍 구경 할 수 있다. 만추의 호젓함을 즐기는 데는 오히려 축제 후가 낫다. 1년을 참고 기다릴 자신 없다면 서두른다. 단풍무리 지나갔어도 실망할 필요 없다. 바닥에 소복하게 쌓인 낙엽들이 더없이 운치있다.
● 하늘 맑은 가을, 풍경 장쾌한 천연 전망대
마을 뒤에 솟은 오서산(791m)은 가을 억새로 유명하다. 억새는 요즘 많이 졌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산세가 워낙 장쾌해 억새 없어도 올라볼 만한 산이다. 하늘 맑은 가을에 이만한 천혜의 전망대도 없다.
오서산은 계룡산, 대둔산에 이어 충남에서 세 번째로 높다. 서해 연안에서는 최고다. 옛날 서해의 배들이 이 산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고 해 ‘등대산’으로도 불렸다. 오서산에서 서해까지 15km나 떨어져 있는데 바다와 산 사이에 특별한 장애물이 없으니 산 정상에서면 서해까지 눈에 들어온다. 대천앞바다와 원산도, 삽시도 등 크고 작은 섬과 칠갑산, 성주산 같은 충남의 명산들이 한 눈에 보인다. 명대계곡을 지나고 오서산자연휴양림 뒤로 난 등산로를 따라 정상까지 갈 수 있다. 1시간 30분쯤 걸린다. 8분 능선까지는 울창한 숲, 이후부터 키 작은 나무들이 나타나고 등 뒤로 시야가 탁 트인다.
장쾌한 풍경 볼 수 있는 곳 하나 더 있다. 오천면 소성리에 위치한 팔색보령수필전망대다. 오서산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다. 보령 출신 소설가 이문구가 쓴 ‘관촌수필’의 8가지 주제를 모티브로 경관을 조성했다. 전망대에서는 서해로 이어지는 물길과 그 너머 천북면과 홍성군 광천읍 일대가 바라보인다. 오천항, 충청수영성, 보령방조제 등도 생생하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 약 500m다. 도미부인사당에서 전망대까지 임도가 연결돼 있어 차로 갈 수 있다. 약 2km 구간인데 임도를 따라 걸어도 좋다. 도미부인사당(정절사)은 백제 때 정절의 여인으로 삼국사기에 전하는 도미부인을 기리는 사당이다.
충청수영성은 구경한다. 오천항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팔색보령수필전망대에서 차로 5분 거리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돼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사령부 역할을 하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다 1896년에 폐영됐다. 지금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을 비롯해 약 1.6k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아직 제대로 정비 되지 않은 탓에 조금 산만하지만, 성벽 따라 걸으며 산책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진휼청 건물을 지나면 오천항과 보령방조제가 나타난다. 크고 작은 배들이 포구에 정박해 있는 풍경이 평온하다. 바다와 접한 서쪽 성벽 일대가 전망이 좋다. 이곳에 있던 영보정은 숱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을 정도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그 자리에 서서 보는 풍경은 어디 가지 않았다. 해안의 지형 따라 뱀이 기어가듯 곡선으로 쌓은 성벽도 예쁘다.
● 시간의 향기 묵직한 성주사지
보령을 돌아다니다보면 보령호를 비롯해 크고 작은 호수와 저수지를 만나게 된다. 청둥오리들이 벌써 자리 꿰 차고 앉았다. 특히 청천저수지 주변에는 데크로 탐방로를 잘 만들어 뒀으니 시간 되면 들른다.
만추에 절터는 가볼만하다. 들판에 흩어진 초석들과 석탑들을 보면 삶을 돌아보게 된다. 분주한 일상 벗어나 마음 살필 수 있는 곳이 폐허의 절터다.
성주사지는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다. 성주면의 평지에 있어 찾아가기도 편하다. 사위 호젓한 절터를 걸어본다. 앞마당 5층석탑은 균형이 잘 잡혔는데 하늘로 날아오를 듯 경쾌한 모양새다. 금당터 뒤쪽 세 기의 삼층석탑은 보수 중이다. 12월에는 마무리 된다는 것이 시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크지 않지만 강건하고 옹골찬 기운 넘치는 탑들이니 메모해 둔다. 석탑 옆으로 있던 석불입상은 보수가 거의 끝나 이달 말쯤이면 볼 수 있단다.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 압권이니 잊지 말고 기억해 둔다. 낭혜화상탑비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됐다. 신라 말 명문장가였던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선종의 대가인 무염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규모가 압도적이다. 발굴과 보수가 진행 중이지만 너른 들판에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함은 훼손되지 않았다.
성주사는 통일 신라 선종 불교의 중심지가 되는 전국의 9곳의 사찰(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다. 한때 2,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을 거치며 쇠퇴하다가 17세기에 들어 폐사된다. 성주사의 전신은 백제의 사찰인 오합사로 전쟁 영웅을 기리는 호국사찰이었다. 이러니 내력이 제법 깊다. 그날의 흥성거림과 묵직한 시간의 향기가 바람 타고 전해진다.
성주사지에서 성주산자연휴양림이 가깝다. 단풍 구경하고 낙엽 밟으면 1~2시간 산책해 본다. 입구에서 편백나무숲 까지만 다녀와도 만추의 서정 느낄 수 있다.
● 여행메모
서해안고속도로 광천IC로 나와 광천읍에서 국도 21호선 타고 청소면까지 간다. 610번 지방도 타고 황룡리 지나 장현리 방향으로 가면 은행마을 입구다. 은행마을에서 오서산자연휴양림이 가깝다. 청소면에서 610번 지방도 따라 오천항까지 가는 길에 팔색보령수필전망대, 충청수영성 등이 있다. 청소면에서 국도 21호선 타면 성주사지와 성주산자연휴양림까지 갈 수 있다.
싱싱한 회를 맛보려면 대천항으로 간다. 요즘 꽃게와 대하가 제철이다. 가게들이 많은데 정남수산(041-932-1762)에서는 꽃게 1kg에 2만5,000~3만원, 대하 양식 1kg 3만원, 자연산 6~7만원에 팔고 있다. 굴과 키조개도 나올 때다. 석화는 1망(10kg)에 2만원, 키조개 3개 1만원이다. 가게에서 회를 골라 식당에서 상차림비를 내고 먹는다. 상차림비는 매운탕 포함 1인 8,000원, 찜 구이 등은 1만원(각 기본)이다.
천수만 가까운 천북면 장은리는 굴구이 단지가 유명하다. 이곳에 방자구이마을은 굴과 키조개 등 수산물을 비롯해 친환경 농산물을 전통 방식으로 구워 먹는 체험이 가능하다. 방자구이는 하인인 방자가 음식을 제대로 조리해 먹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별도의 양념 없이 고기나 재료에 소금만 뿌려 즉석에서 구어 먹던 것에서 기인한 조리 방식이다. 연중 다양한 체험행사가 운영된다. 보령시청 관광과 (041)930-4542
보령=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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