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출가·남편 사별 뒤 덮친 우울증...덜컥 시작한 연극·악기 연주로 극복
지난달 1인극 무대에 관중 몰리기도.."나이 드는 건 외로움 아닌 새 일 기회"
대전 노인복지센터의 연극배우 손정자(72) 할머니는 요즘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스타급 배우이자 연주자다. 아코디언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뿐 아니라, 대전 지역 유일의 실력파 실버 오케스트라 ‘실버 뮤직스타 밴드’의 드럼 주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난달 28일 대전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전국 어르신들의 문화예술축제 ‘청춘제’에서 ‘뒤늦게 발동 걸린 인생 이야기’라는 주제로 1인 모노 드라마 형태의 발표 무대를 선보였는데 손 할머니를 보기 위해 구름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오는 13일에는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한 음악 시상식에서 가수 ‘아이유’와 협연도 예정돼 있다. 손 할머니는 “대전 시내 노인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해 졌다”며 “뒤늦게 발동 걸려도 제대로 걸린 것 같다”며 웃었다.
손 할머니가 뒤늦게 ‘인생 발동’을 걸게 된 이유는 ‘빈 둥지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1966년 결혼 때문에 전남 무주초교 교사생활을 4년 만에 접고 오직 남편 뒷바라지와 양육에만 몰두했던 손 할머니는 자녀(1남2녀)들이 결혼하고 2000년 남편과 사별하자 공허한 마음에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샜다고 한다. 하소연할 곳도 없어 매일 일기를 썼는데, 내용이 모두 자책 일색이었다. 전형적인 노인 우울증이었다.
2008년 더 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작정 대전노인복지회관 연극반에 가입했다. 당시 복지관에서는 ‘신 고려장’이라는 작품을 연습 중이었는데 손 할머니의 ‘끼’를 알아본 권영국 예술강사(극단 ‘고도’ 대표)의 추천으로 대번에 ‘약 장사’로 캐스팅 됐다. 막이 오르면 제일 처음 무대에 나가 관객들의 분위기를 띄우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약 장사 역할을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옛날 장터에서 약 장사가 아코디언을 짊어지고 약을 팔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장 호주머니를 털어 연습용 중고 아코디언을 구입했다. 지금은 나 하나의 사랑, 황성 옛터, 충청도 아줌마 등 ‘십팔번’이 수두룩하다.
2010년에는 대전시 첫 실버 팝오케스트라가 꾸려졌는데 유독 드럼에만 지원자가 없었다. 두 손 두 발을 따로 놀려야 하는 지라 노인들은 물론, 젊은이들도 배우기 어려운 악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드럼을 손 할머니가 ‘덜컥’ 맡아버리고 말았다. “당장,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데, 드럼은 아무도 안 맡겠다는 거에요. 어쩔 수 있나? 내가 지원했죠.” 처음 드럼 앞에 앉았을 때, 크고 작은 북이 4개, 심벌즈가 3개나 눈앞에서 아른거리는데 정신이 쏙 빠졌다고 한다. 자기 전에 베개를 몇 개씩 늘어 놓고 연습을 했고 밥상 앞에서는 밥그릇을 두드렸다. “자나깨나 드럼 생각만 했고 포기하지 않고 죽어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손 발이 움직이더라고요.” 이제는 노인재능나눔 봉사자로 선정돼 지역 아동센터, 경로등에서 연주 및 강의까지 하는 수준이 됐다.
이젠 자신의 경험담을 노인들에게 알려주는 게 목표다. 꿈은 젊은이들만 꾸는 게 아니라, 인생 3막 무대에 선 노인들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걸 주변에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해야 할 ‘90세 버킷 리스트’도 짰다. 먼저, 지인들의 결혼식 때는 축가로 아코디언 연주를 들려 줄 예정이다. 또 80세엔 TV 방송 출연을, 90세엔 공원 모퉁이에서의 작은 독주회를 계획 중이다. “어떤 일이든 찾아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하다 보면 활력이 생기고 슬퍼할 틈도 없습니다. 나이 든다는 건 외롭고 쓸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뭔가 할 일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니까요. 한번 도전해 보세요.”
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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