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때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임금이 정치를 잘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받아들여질 때였다. 태종은 재위 9년(1409) 6월 20일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렸다. 군주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지적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구언이다. 태종은 자연재해는 하늘이 자신을 견책(譴責)하는 것이라면서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은 “정치의 잘잘못과 생민(生民)의 휴척(休戚ㆍ안락과 근심걱정)을 숨김없이 말하라”고 구언했다. 구언은 군주로서 뼈아픈 것이었지만 혹 자신이 민심과 소통하지 못해서 재해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자성 행위였다. 구언에 응해서 올린 응지상소(應旨上疏)에는 어떤 말이 담겨 있어도 올린이를 처벌하지 않는 것도 그만큼 소통을 중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원칙일 뿐 ‘응지상소를 처벌한다’는 비난만 감수하면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때는 태종의 잘잘못을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태종의 처남이자 즉위 1등 공신이었던 민무구가 황해도 옹진에, 민무질이 강원도 삼척에 유배 가 있는 상황이었다. 두어 달 전에는 사헌부 집의 유사눌(柳思訥) 등이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남편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군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사헌부 관료 대부분이 황해도 안악 등지로 유배 가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6월 25일 예조좌랑 정효복(鄭孝復)이 강력한 내용의 응지상소를 올렸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라에 사치하는 풍속이 많아서 순박한 선비는 쓰이지 못하고 아첨하는 풍습이 성하여 곧은 말은 펼쳐지지 못하니 생민의 폐단이 오늘날처럼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태종실록 9년 6월 25일)” 정효복은 이어 “인사(人事)가 잘 되면 휴징(休徵ㆍ상서로운 징조)이 무리 지어 응하지만 인사가 잘못 되면 구징(咎徵ㆍ나쁜 징조)이 무리 지어 응합니다”라고 태종이 인사를 잘못했기에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상벌도 자신과 가까운가 먼가에 따라서 한다고 비판했다. “오호라! 공은 같은데 상은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신분이 귀하고 천한 것을 따랐기 때문이고, 죄는 같은데 벌은 가볍고 무거운 것은 친하고 먼가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무릇 이렇게 하니 상으로 무엇을 권장할 수 있으며, 벌로 무엇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태종실록 9년 6월 25일)” 정효복은 옛 성군들의 선행을 본받고 옛날 쓴 소리하는 신하들이 경계한 말을 오늘의 귀로 듣는 듯 하라면서, “항상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품고, 천명을 공경하고 소민(小民)을 두려워하소서.”라는 말로 상소를 끝맺었다. 다들 태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으로 생각하고 태종이 격노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태종의 반응은 의외였다. 태종은 “곧도다! 이 사람. 조정 신하 가운데 이처럼 곧은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라면서 상소문 중에 ‘공은 같은데(功同)’와 ‘죄는 같은 데(罪一)’의 네 글자에 직접 비점(批點)을 찍고는 사간원 우헌납(右獻納)에 발탁했다. 사간원은 직언과 간쟁을 하는 부서였으니 계속 쓴 소리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공동죄일(功同罪一)은 정효복과 태종이 만든 조선식 사자성어라고 할만하다. 태종은 사실 ‘천명을 공경하고 소민을 두려워’ 한 군주였다. 그래서 동래의 관노 장영실을 등용하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박자청을 판서까지 올리는 등 소민들도 능력만 있으면 중신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직언이 나오는 것을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鳳鳴朝陽)’라고 한다. 당나라의 정사인 신당서(新唐書)-한원(韓瑗)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당 태종의 후사인 고종(高宗)이 부친의 후궁이었던 무측천(武則天)을 총애해서 황후 왕씨(王氏)를 쫓아내고 황후로 삼으려 하자 태종 때부터의 중신 저수량(楮遂良)이 거듭 반대했다. 저수량은 하남군공(河南郡公)으로서 ‘저하남(?河南)’으로 불릴 정도였지만 결국 담주도독(潭州都督)으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다. 저수량마저 쫓겨 가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원이 “저수량은 사직의 신하”라면서 간쟁을 이어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리(田里)로 돌아가고 말았다. 저수량과 한원이 쫓겨 가서 죽은 후 20년 동안 직언하는 사람이 없는 ‘침묵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러다 고종이 봉천궁(奉天宮)에 갔을 때 어사(御史) 이선감(李善感)이 상소로 극언(極言)하니, 사람들이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고 기뻐했다는 이야기다. 직언을 ‘봉황의 소리’라고 높인 것이었다. 공자가 논어- 자한(子罕)에서 더 이상 ‘봉새가 오지 않는다(鳳鳥不至)’라고 슬퍼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 전반이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가 드높은데 정권 안에서 이런 봉황소리를 들어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봉황소리를 냈다간 당장 어떤 일을 당할지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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