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상(36)은 불운한 배우다. 능력에 비해 늘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고 출연작도 대체로 흥행 성적이 좋지 않다. 그가 출연한 새 영화 ‘레드카펫’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이 영화는 포털사이트의 8점(10점 만점)대 관객 평점에도 1일까지 25만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그는 “과정이 좋으면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한국판 워킹타이틀(‘노팅힐’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타임’ 등의 로맨틱 코미디로 유명한 영국의 영화 제작사) 영화라는 평가에 비하면 박한 성적에 아쉬움을 느낄 만하다.
‘레드카펫’은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꿈꾸는 에로영화 감독 정우(윤계상)와 아역 출신 무명배우에서 톱스타로 성장한 은수(고준희)의 사랑 이야기와 음지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들의 유쾌한 도전을 유쾌하게 그린다. 실제로 수백편의 에로영화를 연출했던 박범수 감독이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내 생생한 현장감을 전한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조화가 보기 좋고, 모처럼 환한 웃음을 되찾은 윤계상의 밝은 연기가 반갑다.
영화 속 정우처럼 윤계상의 얼굴에도 미소가 넘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과정 안에 행복이 있지 성공이라는 결과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영화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게 꿈이었고 시청률 잘 나오는 드라마와 수백만 관객이 드는 영화에 출연하는 게 꿈이었지만 지금은 그룹 지오디(god)를 다시 하고 ‘레드카펫’ 개봉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행복하고 즐겁게 일하면 결과는 운명처럼 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내 진정성을 좀 더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젠 바뀌었어요.”
아이돌 그룹 god의 멤버로 화려한 20대를 보낸 그에게 30대는 녹록하지 않았다. 가수에서 연기자로 전업하면서 시련이 시작했다. 데뷔하자마자 어렵지 않게 주연 자리를 따냈지만 배우로 인정받는 일은 그보다 오래 걸렸다.
“가수를 준비할 땐 지오디의 성공이 꿈이었는데 성공하고 정점에 올라가 보니 두렵더군요. 내려갈 것이 뻔히 보이니까요. 어릴 땐 우리가 잘해서 잘된 것이라는 착각이 들고 그 인기가 당연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땐 내가 누리는 것의 소중함을 잘 몰랐어요. 그러다 연기를 만났는데 막연하게 연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누구보다 인정 받고 싶었고 그렇게 10년을 살았어요. 연기하고 인정 받는 꿈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정을 즐기지 못한 거죠.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스스로 틀에 갇혔던 겁니다. 에너지는 충만한데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다 보니 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못한 것 같아요. 그걸 털어버리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슬럼프는 불운하게 부상과 짝을 이뤘다. 드라마 ‘로드 넘버 원’(2010)을 찍다 허리를 다쳤는데 목숨을 걸고 연기하겠다는 생각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다 병을 키운 것이다. 영화 ‘풍산개’(2011)를 찍으며 또 다시 허리를 다친 뒤론 “혼자 세수도 못 할 정도”로 악화됐다. 1년여 연기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아파지더군요. 몸이 망가질 정도로 했는데 뭣 때문에 이렇게 한 건지 회의도 생겼죠. 연기를 인정 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했는데 몸이 아프니까 모든 게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연기를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풍산개’가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연기에 대한 윤계상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게 됐다. 그는 “아무것도 얻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니 얻게 되더라”라고 했다. “잡을 수 없는 걸 잡으려고 하니까, 끝없이 목말라만 하니까 끝도 없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다 나에 대한 칭찬이,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 부족했다는 걸 느끼게 됐고 바닥을 치고 나서 올라오게 됐습니다. 스스로 발성이 약한 배우라고 생각하며 들통날까 겁을 내곤 했는데, 영화 ‘소수의견’(2015년 개봉 예정)의 변호사 역도 해보니 되더라고요. 힘들 순 있지만 두려워하거나 거부할 일이 아니었던 거죠. 그러다 지오디 재결성에 참여하고 ‘레드카펫’까지 하면서 완전히 바뀌었어요. 아니라고 생각해서 버렸던 내 모습들이 결국 내 것이었다는 걸 깨닫고 되찾게 됐죠.”
지오디 재결성이 그에겐 중요한 전화점이었다. ‘연기자가 되려고 지오디를 탈퇴했다’는 오해를 멤버들과 풀고 나자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다. 재결성 활동에 대한 반응도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괜한 걸 미리 걱정했다”는 후회에 “지나간 것들을 한시라도 빨리 되돌려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레드카펫’에서 윤계상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변화 때문이다. 정반합의 과정으로 얻은 결론이랄까. 자신을 부정하고 정반대의 길을 갔다가 이제야 제대로 된 길을 찾았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친 적도 있어요.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죠. 꿈을 좇는 과정에선 돈을 좇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생기니까요. 많은 걸 털어내니 많은 걸 얻게 되더군요. 지금 전 행복합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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