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1일 저녁, 안개비가 내리는 서울 안국동에서 작은 낭독회가 열렸다. 일본의 소설가인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하라 노보루, 그리고 내가 함께 하는 자리였다. 무대 위에 어떤 현수막도 걸리지 않았고 요란한 조명이 비치지도 않았다. 무대장치라곤 사회자와 통역자까지 다섯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낮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제2회 한일작가낭독회라는 이름이 붙은 이 모임의 첫 회는 작년 겨울 요코하마에서 열렸다. 요코하마 가나가와 근대문학관 관장이기도 한 중견소설가 츠지하라 노보루 작가의 제안으로, 에쿠니 가오리와 내가 낭독자로 나섰다. 우리는 소박한 무대에 올라 각자가 고른 작품을 낭독했다. 나는 삼풍백화점이라는 단편을 낭독했다. 물론 한국어로 읽었다. 청중은 거의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 청중들은 내가 한국어로 낭독할 때에 귀로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미리 준비된 일본어 번역을 읽었다. 에쿠니 가오리가 일본어로 자신의 소설을 낭독할 때도 역시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한국어 텍스트를 묵독으로 읽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미리 번역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한 작품의 전문을 다 낭독하자는 츠지하라 작가의 의견이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했다. 200자 원고지 80매가 넘는 분량을 다 읽으려면 아무리 빨라도 20분 이상은 소요될 터였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낭독을 들어야 하는 청중들에게 그 시간이 혹 지루하거나 답답하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염려됐다. 그런데 막상 낭독회가 시작되고 나니 그것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일본어를 거의 알지 못하는 나에게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낭독은 일종의 음악처럼 들렸다. 귀로는 외국어, 눈으로는 모국어를 통해 한편의 소설을 느끼는 순간의 감상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전에 받아본 적 없는 공감각적인 자극인 것만은 분명했다. 청각을 자극하는 외국어와, 눈에 읽히는 한국어는 결국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어떤 미묘하고 작은 틈이 느껴진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서울에서 열린 제2회 낭독회도 큰 틀은 비슷했다. 작가들이 각자의 언어로 낭독하는 동안, 배경음악은 일부러 틀지 않았다. 그 무대의 주인공이 오롯이 소설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츠지하라 노보루 작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상 수상작인 ‘고엽 속의 푸른 불꽃’을, 나는 짧은 소설집 말하자면 좋은 사람 중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에쿠니 가오리 작가는 나오키 상 수상작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 ‘생쥐 마누라’를 낭독했다. 각자의 언어로 낭독하는 동안, 관객석에서는 기침소리 하나,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독자들을 위해 한국어 번역본이 실린 소책자를 만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일본 작가의 낭독에 맞추어 자연스레 관객들의 페이지도 넘어갔다. 낭독회 뒤에는 진솔한 대담이 이어졌다.
‘문학, 개인, 통로’라는 주제에 대해 에쿠니 가오리는 “그 통로는 자기 안으로 이어진 작은 길이 아닐까 싶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는 작은 길을 걷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 문학이다”라는 말을 했다. 국적과 언어를 넘어,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끝나고 나서는 그 흔한 사인회도 열리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그것이 이 시간을 더 깊은 여운으로 남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낭독과 묵독은 명백히 다르다. 모든 독서행위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므로 묵독이 자연스러운 독서방법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다. 그렇지만 가끔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일, 함께 읽는 행위의 그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조선시대에는 대중들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이 있었다. 그들의 낭독 비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첫째, 읊조리듯 노래하듯 읽어라. 둘째, 가슴으로 외워라. 셋째, 눈길과 표정 자세를 청중에게 맞춰라. 넷째, 이야기가 고조되는 부분에서 잠시 멈춰라… 이 쓸쓸한 계절에는 목소리의 힘, 진심의 힘, 문학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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