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컴퓨터 가격 120배 부풀려, 수출실적 조작해 3조 사기대출
매출채권 써줘 대출 가능하게 해준 美·中 유명 총판업체 공모 의혹
성공한 중소 벤처기업으로 주목 받다 갑작스러운 법정관리 신청으로 파문을 일으킨 가전업체 모뉴엘이 2009년부터 6년여 동안 3조2,000억원에 달하는 규모의 위장수출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상품 가치가 없는 폐 컴퓨터의 가격을 120배까지 부풀리는 등의 수법으로 수출 실적을 조작한 뒤 금융기관으로부터 거액의 대출을 받고 이를 해외로 빼돌려 로비자금 등에 사용해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의 유명 전자제품 판매회사들이 위장수출을 방조했다는 정황까지 포착됐다.
31일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은 3조원대의 제품을 허위수출한 혐의(관세법 위반) 등으로 가전업체 모뉴엘의 박홍석(52) 회장과 신모(49) 부사장, 강모(42) 재무이사 등 3명을 구속하고 범죄에 가담한 자금팀장 등 13명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위장수출 수법은?
관세청 조사와 박홍석 대표의 진술을 종합하면 이번 사건의 시작은 2007년으로 거슬러간다. 2004년 설립 후 사업 규모를 차츰 늘려가던 모뉴엘은 2007년 주력상품이던 홈씨어터PC 케이스(가정용 영상 음향 재생장치: HTPC)의 일부에 하자가 발생, 대규모 반품이 들어오면서 자금난에 봉착한다. 부도 위기에 몰리자 박회장은 반품된 물품을 홍콩의 페이퍼컴퍼니에 재수출하고 이를 근거로 담보대출을 받는 방식으로 자금난에서 벗어난다.
위장수출에 ‘재미’를 본 박회장은 2009년부터 이 같은 수법을 본격 도입한다. 수출 규모를 부풀리기 위해 8,000원에서 2만원 정도인 HTPC 제품을 무려 250만원짜리로 둔갑시켰다.
이 때만해도 일부 제품은 실제로 수출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법은 더욱 대담해졌다. 2011년부터는 아예 해외에 공장을 두고 중개 수출을 하는 방식을 택한다. 관세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공장이 없는데도 제품을 이동시킨 것처럼 가짜 운송장을 만들어 은행에 제출했다. 그러다 올 초에 100만 달러를 들여 가짜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곳에 3~4명의 상주인력을 고용하고 은행 등이 실사를 하러 오면 30여명의 일용직을 채용하고 빈 박스를 창고에 쌓아둬 가동중인 공장으로 위장하는 식이었다.
이런 수법으로 모뉴엘이 2009년부터 올 7월까지 3,330차례에 걸쳐 허위수출한 규모는 29억달러, 우리돈으로 3조2,000억원에 달한다. 관세청은 모뉴엘의 자회사인 잘만테크도 2012년 3월 중순부터 올 6월 중순까지 76차례에 걸쳐 홍콩에서 8,800만달러(약 927억7,000만원)를 위장수출한 사실도 적발했다.
미국과 중국 총판업체들도 공모?
위장수출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판매 방식에 있었다. 모뉴엘은 직접 판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총판업체에 제품을 공급하고 대가로 현금이 아닌 매출채권을 받는 형태로 거래를 해왔다. 모뉴엘은 이 매출채권을 은행에 할인 매각해 현금을 융통했다. 은행은 채권 만기에 총판업체로부터 매출채권 채무액을 회수하는 구조다. 사실상 대출과 같은 매출채권 팩토링 방식이다. 모뉴엘은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채권 만기 전에 제품을 다시 사들이는 방식으로 돌려막기를 해왔다.
특히 매출채권을 발행해준 총판업체들은 대부분 상당히 유명한 회사들. 미국의 전자제품 판매업체인 ASI컴퓨터와 중국의 CNBM, 완싱, 뉴에그, 그리고 KT 계열사인 KT ENS 등이었다. 중국의 CNBM의 경우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갈 만큼 규모가 큰 업체다. 모뉴엘은 브로커에게 수출금액의 1.5~10%를 수수료로 지급하고 이들 총판업체에 물건을 판매하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까닭에 관세청은 총판업체들이 피해자가 아닌 공모자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성일 서울세관 조사국장은 “총판업체들이 중간에 브로커들에게 속아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볼 수는 없는 사건”이라며 “어느 선까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총판업체들도 이번 사건에 대해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해당 국가의 관세당국에 통보해 적절한 조사가 이뤄지도록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보와 은행, 속았나 공모했나
은행권의 부실대출도 한심한 수준이다. 모뉴엘이 위장수출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2009년은 이미 HTPC가 시중에서 자취를 감추던 시점이었다. 한성일 국장은 “8월에 모뉴엘이 위장수출을 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은 뒤 이미 사라진 홈씨어터 제품으로 어떻게 1조원대 매출이 가능한지가 의아했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직접 홍콩 공장까지 실사를 했다”고 말하지만, 곳곳에서 허술함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모뉴엘에 보증서를 발급해 준 무역보험공사의 경우 내부직원이 사기대출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실제로 모뉴엘의 작년 매출 1조2,737억원 가운데 HTPC가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이른다. 관세청은 이 가운데 진성 매출은 로봇청소기 등을 판매한 7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모뉴엘은 10개 은행에서 6년동안 모두 3조2,000억원의 사기대출을 받았고, 현재 6,745억원을 상환하지 못한 상태다.
박회장은 위장수출로 국내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돈을 자신이 관리하는 홍콩 페이퍼컴퍼니 계좌에 송금하는 방식 등으로 446억원을 해외로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박회장은 이 돈을 수출위장업체 알선 등을 위한 브로커비용 등에 사용하고, 국내로 반입한 120억원은 도박자금이나 별장구입 등으로 유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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