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무르익던 남북대화의 기운이 급속하게 소진되고 있다. 북한은 어제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보낸 국방위원회 서기실 명의 전통문에서 “고위급접촉을 개최하겠는지, 삐라 살포에 계속 매달리겠는지는 남측의 책임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압박했다. 사실상 2차 남북고위급접촉 성사와 대북전단 중 양자택일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전날 우리 정부는‘2차 고위급접촉 30일 개최’ 제안에 대한 입장을 어제까지 밝힐 것을 북측에 통고했다. 북측의 전통문은 이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정부는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민간단체의 전단 살포는 우리 체제 특성상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 맞받아쳤다. 남북간에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나 북측의 부당한 요구까지 수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난 4일 북한 고위실세 3인의 전격 방남 당시의 합의에 따라 우리 정부가 북측에 제안한 30일 고위급접촉은 물 건너 갔다.
물론 ‘10월 말에서 11월 초 개최’라는 합의에 따르면 11월 초의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사실상 연내 개최도 어렵다고 봐야 한다. 북측은 남측 정부가 자신들 체제의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전단 살포 행위를 방치하면서 무슨 대화냐고 하고, 남측 역시‘체제의 특성’을 내세워 전단 살포를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소모적인 신경전을 벌이며 헛돌다 보면 어느 세월에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현안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는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남북이 서로 누가 더 아쉽나 하는 식의 버티기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이번에 조성된 대화 기회가 무산되면 또 상당기간 도발과 긴장고조의 악순환에 빠질 게 분명하다. 유엔 총회에서 북한 최고지도자의 국제형사재판소(ICC) 회부 권고를 포함한 북한인권 결의안 채택이 추진되고 있는 것도 향후 남북관계에 중대 변수가 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을 지혜롭게 관리ㆍ통제하지 못한다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드레스덴 구상, 동북아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니 등은 한낱 구상에 머물고 만다.
정부는 공허한 명분에 스스로 발목 잡힐 게 아니라 북한을 대화와 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낼 실질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언젠가 얘기했던 ‘고르디우스 매듭’처럼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김정은 체제와 대화를 하겠다면 상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여건은 만들어 주는 게 당연하다. 결단은 북한 김정은 정권에도 해당된다. 자신들 체제의 최고 존엄만 내세울 게 아니라 남측 체제의 특성도 이해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감내해야 돌파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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