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엔 아직도 관행이란 이름으로 소비자에게 행해지는 횡포가 적지 않다. 전문지식의 격차를 이용해 “원래 이러니 받아들이라”는 식인데, 비용까지 지불하고 종종 뒤통수를 맞는 소비자로선 울화통 터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증권업계를 뒤흔드는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사장의 일거수일투족은 눈여겨볼 만하다. 작년 9월 취임 이후 그는 증권 영업의 ABC와 같던 견고한 관행들에 숱한 도전장을 날리고 있다. 삼성증권, 우리금융지주 등에서 대규모 조직개편을 주도하며 ‘미스터 구조조정’으로 불렸던 이가 이번엔 거대한 관행에 칼을 들이대고 나선 셈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 중엔 '매매수수료 고해성사'가 있다. 증권사 직원들이 사실은 수수료 수입을 위해 고객에게 불필요한 매매를 부추겨 결국 손해를 보게 만든다는 고백이다. 한화투자증권은 자체 분석을 통해 이를 입증하는 회전-수익률간 관계 보고서까지 냈다. 설마 하던 의혹에 대 놓고 “제가 그랬습니다”며 나오니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한 자산운용사 사장이 “일부 통계를 확대한 편견”이라고 반박하자 주 사장은 “기초 상식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라며 아예 직원들의 개인별 매매 중개 성과급까지 없애 버렸다.
‘매도’ 리포트도 그렇다. 주가가 오르건, 떨어지건 1년 내내 ‘사라’(매수)고만 권하는 증권사 리포트의 천편일률 관행에, 아예 리포트 10건 중 4건에는 중립 또는 매도 의견만 담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총 10건에 그쳤던 업계 전체 매도 리포트가 올해는 한화투자증권(8건) 덕에 9월말 현재 20건까지 늘었다.
이밖에 “너무 위험하다”며 레버리지 펀드(일간 등락률의 1.5~2배 수익을 주는 고위험 펀드) 판매를 중단하는가 하면, “잘 모르는 건 안 팔겠다”며 판매 펀드 개수도 440개에서 100여개로 대폭 줄였다.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위험 주식 종목’까지 분기별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도전은 주 사장이 취임 때부터 공언했던 것들이다. 수년간의 누적적자 해결 임무를 띠고 영입된 그는 “문제는 침체된 시장보다 고객 신뢰를 잃은 증권사 내부에 있다”며 “고객이 믿고 찾아오게 만들자”는 역발상 해법을 내놓았다. 매매수수료 수입이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에다, 펀드매니저를 ‘모시고’ 지내야 하는 증권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스스로 무덤을 팔 수 있는 모험인 셈이다.
다른 이도 아닌 증권사 사장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회사 안팎에선 적들도 많다. 매도 리포트 작성 지시에 반발한 애널리스트들이 대거 회사를 떠났고, 내부 구조조정 과정에서 피해를 본 직원들은 증오를 감추지 않는다. 경쟁자이자 공생 관계에 있는 타 증권사에선 “현실을 모르고 나댄다”는 비아냥도 적지 않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주 사장의 도전은 ‘유쾌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 아깝지 않다. 오랫동안 소비자를 봉으로 여기던 금융권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양심선언은 반갑기 그지 없다. 암호 같은 용어들, 자기들끼리만 아는 계산법, 고무줄처럼 갖다 붙이는 금리 등 아직도 얼마나 많은 금융사 관행들이 소비자를 골탕 먹이고 있는가.
부디 주 사장의 유쾌한 도전이 끝내 성공하길 바란다. 그에겐 이런 파격들이 회사 수익을 높일 수단이겠지만 소비자가 잘 돼야 기업도 잘 된다는 마땅한 상식이 그 파격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한번쯤은 입증됐으면 한다.
염려되는 것은 그의 짧은 임기(3년)다. 영입된 전문경영인이 앞으로 2년, 남은 임기 안에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그의 도전은 자칫 반짝 이벤트에 그칠 수도 있다. 업계를 들쑤시는 그의 행보에 한화그룹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다양한 평가가 엇갈린다는 소문도 들린다. 그룹도 눈 앞의 성과뿐 아니라 증권업 전체의 미래를 위해 그의 실험을 지켜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사장의 지시로 한화투자증권은 앞으로도 20~30개의 추가 도전장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냉정히 말하면 소비자의 관심은 증권사의 수익 개선은 아니다. 하지만 주 사장의 도전을 계기로 증권사들이 서로 솔직하기를 경쟁하고, 다투어 고객 입장을 생각한다면 소비자들도 오랜 ‘생각의 관행’을 벗어 던질 것이다. 늘 고객을 속여 먹는 금융사라는 생각 말이다.
김용식 경제부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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