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흉내내야 하는 배우 열연
전작들과 또 다른 광기 보여줘
"역할의 고통 진심으로 느껴졌죠"
설경구의 얼굴에는 광기가 숨어 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얼굴 속의 그 광기. 그건 정신이상자의 얼굴이 아니라 절박한 열정으로 삶을 관통한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진한 파토스의 결정체다. 30일 개봉하는 영화 ‘나의 독재자’(이해준 감독)에서 그는 ‘박하사탕’에 필적할 만한 광기 어린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 스스로도 “‘박하사탕’ 이후 가장 어려웠던 연기”여서인지 촬영이 끝난 지 한참 지난 지금도 “찜찜하다”고 했다.
‘나의 독재자’에서 1970년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대통령과 회담 리허설을 할 대역 오디션에 무명 배우 성근(설경구)이 합격한다. 성근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필사적으로 몰입하지만 회담은 결국 무산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뒤 성근은 자신을 증오하는 아들 태식(박해일)에게 버림 받고 요양소에서 지내면서도 자신을 김일성이라고 믿는다. 영화는 광기 어린 망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를 원망하는 아들의 화해에 방점을 찍는다. 설경구는 “처음 읽을 땐 정치적 요소 때문에 무거운 느낌이었는데 두 번째 읽을 때는 부자지간의 재미있는 얘기로 갈 수 있겠다 싶어 한결 느낌이 가벼웠다”고 했다.
김일성 대역 배우를 연기했지만 그는 김일성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이 아니라 김일성을 흉내내야 하는 배우 성근을 연기했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큰소리만 치는 성근과 그를 원망하는 태식에게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서먹한 부자관계를 이식하기도 했다. “그 시대의 아버지는 무능하고 권위도 없는데 권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가장 약한 사람이었죠. 시대에 먹히고 자식에게 먹힌 세대죠. 몇 년 전 아버지가 제게 ‘하느라고 했는데 미안하다’고 하시더군요.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보다 불쌍한 사람이 아버지인 것 같아요.”
변변한 역할 한 번 못 맡아본 성근처럼 오래도록 무명 시절을 거친 건 아니지만 설경구에게도 절박한 마음으로 연기에 몰두했던 순간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영화 ‘박하사탕’ 때다.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부담이었던 연기였습니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연기가 잘 되지 않아 촬영하다 이창동 감독에게 무릎 꿇고 사과한 적도 있어요. 그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스트레스가 심했죠.”
25년간 배우로 살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기를 보면 부끄럽다고 한다. 입바른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진지한 고민처럼 들렸다. 그에게 배우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연기에는 묘한 끌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약 같아요. 하지만 배우로서 제대로 사는 건 힘이 듭니다. 특히 성근 같은 역을 할 땐 고통스러워요. 고통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나와요. 진심으로 했는지 안 했는지 보는 사람은 압니다. 진심이 아니면 대중은 마음을 닫아버려요. 그러니 정말 어렵죠.”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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