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 혹은 남 탓?
통념은 쉽게 안바뀌어
과학과 정치의 조화 필요
사회의 혼란과 불신이 정치인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국민들 때문일까? 작년에 방영됐던 유명 정치드라마에 나왔던 정치인은 자신들의 잘못보다는 한심한 국민들의 무지함 탓이라고 답했다. 물론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비단 정치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제품의 실패를 제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뒤처진 시장 탓을 한다. 첨단 기술에 기반한 제품이 팔리지 않는 건 시대를 앞서간 유능함과 한심한 사용자 때문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제품은 시장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시장에서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점을 망각한 한심한 생각이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우월하더라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 부은 홍보를 통해 제품을 인지시킨다 하더라도, 시장과 사회가 수용하지 않는 기술과 제품은 결국 사라지고 만다.
30여년 전 획기적인 전기 스쿠터가 영국에서 발표됐다. 1인승 3륜 전기차인 C5는 최고 속도가 시속 24㎞에 불과해 당시 영국의 규정상 운전면허가 없어도 몰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출퇴근과 통학, 시장을 오가는 데에는 충분한 속도다. 가격 또한 400파운드에 불과했고, 30파운드를 추가 지불하면 배달까지 해결됐다. 하지만 C5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차체가 너무 낮아 다른 자동차의 운전석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모든 자동차의 눈높이를 C5에 맞추지 않으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탑승자를 태우고 달리는 자동차로서의 가장 기초적인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기존의 도로와 교통체계와 공존할 수 없었다. 결국 C5는 시장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이후 기술적으로 뛰어나더라도 사회적 수용성을 갖추지 않아 실패한 사례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기술이 사회가 구축해 놓은 장벽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 동안 기차의 기술은 증기기관차에서 KTX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오래 전 놓인 철로의 간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철로의 간격은 러시아나 일본과 서로 다르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해저터널이 생긴다면 터널 중간에서 열차의 바퀴 간격을 조정해야 할지 모른다.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도 동일한 이유로 서로 오가는데 불편함이 있다. 옛날에 구축된 철도의 궤간이라는 사회의 높은 벽을 바꾸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일부 구간만 바꿔서는 안되며 일시에 모든 철도를 바꿔야 오가는 사람과 화물운송에 큰 지장이 없다. 이랬다간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철도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교통수단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어린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의 타요 버스를 탄생시킨 버스 체계 개편은 여러 모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1,000만 인구의 대도시에서 하루 아침에 전체 노선 체계를 모조리 뒤엎은 건, 어쩌면 모든 차량을 C5로 일순간에 바꿀 수도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게 만든다. 물론 버스 노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용이 들 것이다.
“사람들은 왼쪽 길, 차나 짐은 오른 길”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었다. 차들은 우측통행을 하지만 사람들은 인도에서 좌측통행을 했었다. 헷갈리지 말고 다녀서 사고 나지 않도록 하라는 계몽적 성격의 노래였는데, 얼마 전 인도에서의 통행법이 우측통행으로 바뀌면서 용도 폐기됐다. 하지만 오랜 시간 쌓여온 습관 때문에 혼잡한 출근길에서 좌우측 통행이 마구 섞여버린 혼돈을 목격하곤 한다. 아주 간단한 통행 방법의 변경이지만,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수용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사고의 위험 탓에 잘못된 에스컬레이터 이용 문화라고 하는 좌측보행, 우측양보의 습관 역시 잘 고쳐지지 않고 있다.
기술과 사회는 얽히고 설키며 공존해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우수한 기술을 사회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과학기술인들은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위험한 괴물을 만들어낼지 모르니 사회가 통제해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접근은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학문 자체는 정치와 상관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연구개발은 사회의 공감대에 기반해야 하며, 이는 정치 행위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과학기술인들의 사회와 정치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이해, 참여가 있어야 한다.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ㆍ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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