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집 압박 베이비부머 세대 우울증 환자 5년 새 1만명↑
대기업 고위 임원으로 일하다 올해 3월 퇴직한 A씨(56)는 6개월째 바둑과 등산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회사 안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아 눈치가 보였다는 게 사직서를 낸 이유였다. 4인 가족의 가장인 그는 최근 중견업체 서너 곳에 이력서를 찔러 넣고 있다. 큰 아들은 직장 4년차이지만 서울 외곽에 전세라도 얻어주려면 퇴직금을 떼줘야 하고, 대학 4학년인 딸은 언제 취업이 될 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노후 대비는커녕 여전히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해 머리가 지끈거리고 울적할 때가 많다. ‘58년 개띠’로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인 A씨는 “우울증 때문에 정신과를 찾는 동료들이 남일 같지 않다”고 했다.
우울증 때문에 치료를 받는 50대 남성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직장과 가정에선 설 곳을 잃어가고, 어려움에 처해도 자식에게 선뜻 기대지 못하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팍팍한 사회경제적 상황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26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간 건강보험과 의료급여 심사결정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우울증 환자는 66만5,000여명으로 2009년(55만6,000여명)보다 19.6%(10만9,000여명) 늘었다. 총 진료비는 같은 기간 2,135억원에서 2,714억원으로 27% 가량 증가했다. 지난해 여성 우울증 환자는 45만6,000여명으로 남성(20만9,000여명)보다 2.2배 많았지만 남성 환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5.4%로 여성(4.2%)을 앞질렀다.
특히 50대 남성 우울증 환자는 2009년 3만4,413명, 2010년 3만7,217명, 2011년 4만104명, 2012년 4만5,064명, 지난해 4만6,302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50대와 70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연령대의 남성 우울증 환자는 전년 대비 소폭 감소하거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한 50대 남성들이 늘면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50대 남성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58명으로 전년(53.2명) 대비 8.9% 증가했다.
기선완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회사에서는 조기 퇴직 압박에 시달리고 직장을 나와서는 자식의 봉양에 기댈 수 없는, 마땅한 노후 대책이 없는 50대들이 답답한 현실 앞에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실제로 많아진 결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기 교수는 최근 자살예방사업이 적극적으로 전개돼 우울증에 시달릴 경우 정신과를 찾는 데 덜 주저하게 된 것도 요인 중의 하나라고 분석했다. 기 교수는 “50대 남성들이 정신과에 찾아가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예전보다 줄었고, 최근엔 주위에서 권하는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방수영 을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도 “인구 수가 많은 베이버부머 세대가 50대가 되고, 이들이 실직과 명예퇴직 등 스트레스를 받은 영향과 우울증 치료에 선입견이 줄어든 결과로 보인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박두병 심사위원은 “50대 남성들의 경우 우울 증상을 홀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약물치료와 함께 정신치료, 인지치료 등 적극적 치료로 일상에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며 “증상을 악화시키는 술과 담배를 피하고, 걷기와 조깅 등 신체활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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