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들어 전국 곳곳에서 아동학대에 대한 사법처리가 크게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사례들이 있었다. 부산에서 아들(13)을 심하게 때린 30대 아버지를 가족으로부터 격리하고 접근을 금지하는 긴급 임시조치가 처음으로 내려졌다. 전북에서는 지적장애 친딸(13)을 강제 추행한 아버지에 대해 2개월간 친권행사를 제한하는 법원 결정이 나왔다. 서울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참다 못해 가출한 딸(16)이 직접 법원에 아버지의 접근금지를 청구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모두 아동학대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지난달 29일 시행되면서 가능해진 일들이다.
한동안 국회 계류 중이던 이 특례법이 지난해 극적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울산 계모의 학대에 숨진 서현(당시 8세)이 사건의 여파였다. 소풍 날 아침 계모는 서현이가 거짓말을 한다며 한 시간동안 때려 갈비뼈 16개가 부러졌고,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부모들이 격노했다. 자기방어력이 없는 어린 아이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때린 것은 훈육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울산 계모는 최근 항소심에서 살인죄를 적용받아 징역 18년형을 받았는데, 시민 여론이 없었다면 아동학대 치사 사건에서 처음으로 살인죄가 인정되는 일도 없었을 터다. 언론의 주목 없이 재판이 치러졌다면 상해치사로 기껏 징역 4~7년형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1심까지만 해도 살인이 아니라고 했다. 1심 재판부는 “마음 먹기에 따라 흉기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손과 발만으로 피해자를 구타했다”는 등의 이유로 살인 의도가 없었다고 봤다. 하지만 시민의 상식으로는 저 여린 신체에 체중 3배인 어른의 손과 발이 야구방망이만 한 흉기가 될 수 있음을, 학식 많은 판사가 어떻게 간과할 수 있는지 오히려 의아할 뿐이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똑 같은 사실로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했다. 비로소 흉기를 준비했는지 사전 모의가 있었는지를 기계적으로 따지던 판사의 판결과 시민의 상식적 판단이 괴리를 좁혔다. 앞으로 아동학대 치사 사건을 엄벌할 수 있는 새로운 판례가 마련된 것이다.
이 모든 일을 가능케 한 것은 이 세상에서 8년을 머물다 간 서현이의 짧고 슬픈 생이었다. 그리고 서현이를 지켜줬어야 했다고 부채의식을 느낀 시민들이 그 죽음을 헛되이 흘려 보내지 않은 결과였다. 이제 학대 부모를 격리시킨 경찰, 남의 집 일로만 여기지 않고 신고하는 이들, 살인죄를 적용한 검사와 판사들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를 압박한 시민들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쟁취해 냈다. 어떤 이들은 재판이 여론의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말하지만, 이런 여론이라면 반드시 영향을 받아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따르지 않는 법과 판결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몇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우선 살인죄를 인정하고도 징역 18년형은 가볍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였을 어린 아이에게 반복적인 폭행과 학대, 세상에 자기 편은 없다는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 4년을 살게 한 죄, 갈비뼈가 부러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어린 목숨을 빼앗은 죄, 그리고 밝게 자라났다면 수십년 인생에서 성취했을 그 모든 가능성을 앗아간 죄. 그 죗값은 어느 정도여야 정의로운지 논의해볼 일이다.
살인죄 아닌 학대치사죄를 적용했을 때의 형량 역시 앞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아동학대처벌특례법이 학대치사에 대해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이 가능토록 법정 형량을 강화했지만 법원의 양형기준은 또 다르기 때문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3월 발표한 아동학대 치사죄에 대한 강화된 양형기준은 최대 9년의 실형이었다. 하지만 아동학대가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집안에서 이뤄진다는 특성을 감안한다면, 강화됐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울 권고형량이다.
학대 아동의 사례를 조사하고 보호할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하는 것에는 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가 또 다시 관련 예산을 삭감하거나 국회가 그런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부터 나설 생각이다. 그것이 서현이에 대한 미안함을 우리가 감당하는 방식일 터이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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