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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속박하는 맹신에 맞선 교단의 이단자

입력
2014.10.2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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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몽매주의와 싸우다

'성서 기록=절대 진리' 신봉, 보수적 교단과 목회자들을 목사이자 종교학자로서 비판

존엄사 합법화 선봉에 서다

종교학 대신 노인학 교수 변신, 80년 '헴록 소사이어티' 설립

종교학자이자 노인학자 라루 박사는 종교의 몽매주의와 제도ㆍ관습의 억압에 맞서며 인간의 존엄이 삶과 죽음을 관통하며 유지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선구적 존엄사 합법화 운동가로서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인간은 삶의 추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이단자 라루'라는 자신의 별명을 영예롭게 만들었다.
종교학자이자 노인학자 라루 박사는 종교의 몽매주의와 제도ㆍ관습의 억압에 맞서며 인간의 존엄이 삶과 죽음을 관통하며 유지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선구적 존엄사 합법화 운동가로서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인간은 삶의 추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이단자 라루'라는 자신의 별명을 영예롭게 만들었다.

기독교의 퇴행적 보수성과 몽매주의에 맞서 교회 혁신과 종교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헌신했던 ‘이단자(Heretic) 라루’가 9월 17일 작고했다. 신학대학을 나온 목사이자 종교학자인 그는 성서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교회와, 자신도 안 믿으면서 성서의 기록을 역사의 진실처럼 설교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했다. 또 노인학자로서 삶의 위엄 못지않게 죽음의 존엄을 중시했고,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에 생애를 바쳤다. 기성 교단과 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도발적이고도 전투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시민 개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는 외적인 것들의 허구를 폭로했다. 향년 98세.

1993년 2월 미국 CBS는 터키 아라라트 산에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 조지 자말이라는 남자가 방주의 잔해라며 가져온 나뭇조각을 근거로 ‘선 인터내셔널 픽처스’라는 한 독립 제작사가 만든 이 다큐멘터리에는, 당연하게도 교회와 창조론자들의 들뜬 찬사와 확신에 찬 해설까지 곁들여졌다. 그리고 얼마 뒤 캘리포니아대 라루 교수는 ‘타임’인터뷰에서 그 거대한 사기극을 조롱을 섞어 폭로한다. 방송사는 뒤늦게 전문 기관에 의뢰해 탄소 동위원소법으로 나뭇조각의 연대를 측정, 그게 실은 블루베리즙과 바비큐소스 등에 착색된 침목 조각인 사실을 확인한다.

이 대형 방송 스캔들은 물론 자말의 사기에서 비롯됐지만, 라루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자말의 사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시작됐다. 라루 역시 자말을 만나 황당무계한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방송의 무책임한 태도가 어떻게 이어지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방관했다고 한다. 거짓이 폭로된 직후 창조과학회 관계자는 자신들이 그렇게 오래 그의 어설픈 사기에 놀아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라루에게 그들은 사기 피해자가 아니라 방조자 혹은 암묵적 공범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겨냥한 것은 한 사기꾼이나 무책임한 방송 관행이 아니라 믿고픈 것을 쉽게 믿는 인간의 허약한 이성, 그리고 성서의 기록이라면 무조건 절대진리라 여기는 극단적인 종교인들이었을 것이다.

종교 고고학자로서 예루살렘 등지의 발굴 현장을 누볐던 그는 예리코 성벽의 붕괴가 신(神)의 힘이 아니라 지진의 결과라는 가설,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나사로의 기적은 혼절(Coma) 상태에서 깨어난 것일 뿐이라는 등 성서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곤 했다. 성모마리아의 기적으로 은으로 만든 묵주가 금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했다며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여인에게 대중이 보는 앞에서 묵주를 변색 제거제에 담가 보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그의 ‘불경스런’ 제안은 물론 거절당했다.(LA Times, 2014.9.21) 그는 미신적 몽매주의(magical thinking)를 특히 못 견뎌 했다.

제럴드 라루(Gerald Larue)는 1916년 6월 20일 캐나다 캘거리에서 태어났다. 43년 신학과 예술 전공으로 엘버타대학을 졸업, 45년 캐나다 통합교회로부터 목회자 자격을 얻었다. 이후 약 8년간 목사로 재직했고, 미국 버클리대에서 53년 박사학위를 땄다. 그 해 그는 목사직을 내놓았고, 남캘리포니아대학(USC) 종교학과 교수가 되는 58년까지 미국기독교교회의회의 성서 연구회 회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회의론자였다. 훗날 인터뷰에서 목사를 사임할 당시 이미 ‘신의 존재는 알 수 없다(an open question)’는 게 자신의 입장이었다고 밝혔다.

‘자유연구(Free Inquiry)’라는 잡지에 기고한 ‘성직자가 침묵의 죄를 범할 때’라는 글에서 라루는 성직자가 세미나 등을 통해 알게 된 기독교의 역사나 성서의 진실을 신도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을 ‘침묵의 죄’라고 비판했다. 성 평등이나 생태, 공립학교의 진화론 교육 등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드러내면서도 교회 설교단에 서면 도그마에 갇히는 성직자들이 허다하다고도 했다. 93년 방주 스캔들 직후 라루는 여러 목사 친구들로부터 격려와 동조의 전화를 받았지만 그가 “당신은 왜 CBS에 항의편지를 쓰지 않느냐” “노아의 이야기가 허구라는 사실을 왜 당신은 설교할 때 말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겸연쩍게 웃으며 한결같이 “No Way”라고 대답했다고도 했다.

라루는 실제로 그런 설교를 했다가 신도집단의 배척을 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의 사례도 소개했다. 캐나다 교회 목사 빌 피프스(Bill Phipps)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97년 12월 예수가 신이 아니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가 종교잡지 등 매스컴의 집중포화를 당했다. 피프스 목사는 “신은 예수보다 더 크고 신비로운 존재여서 우리의 인식과 이해 너머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격화한 신도, 신의 대리일 수도 없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뒤 살아나 천국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나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부활의 힘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힘, 그 믿음의 힘을 의미한다”고 설교했다. 피프스 목사는 지옥과 천국의 관념을 부정했지만, 사후에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는 인간의 영혼은 긍정했다. “숨을 거둔,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신과 함께 평온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그는 신도들의 험한 수모와 교단의 분노에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라루는 피프스와 같은 성직자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창세기나 출애굽기가 그 어떤 역사적 근거도 없는 허구임을 신도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10계명을 포함한 토라의 계율들 중에 인본적 윤리와 배치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여인을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마음으로 간음을 범하는 죄라고 규정한 마태복음 5장 27절을 예로 들며 그는 성서의 어떤 내용들이 이 시대의 윤리의식에 비춰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말하곤 했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라루는 “아버지는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오류 투성이인 불멸의 규율에 인간이 속박당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NYT) 제럴드 라루는 인간의 선한 삶을 북돋우는 한에서 종교를 긍정했지만, 숭배나 찬양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위험하고 공공연한 내부고발자였다.

신학대 재학시절부터 그는 교수들로부터 ‘이단자 라루’라고 불렸다고 한다. 훗날 목사가 되고 종교기관의 성서 연구자로 활동한 것을 보면 당시의 저 별명은 그리 진지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그는, 적어도 보수 교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짜 ‘이단자’였다.

죽음에 대한 그의 관심은 70년대부터 이어져온 듯하다. 76년 그는 한 심리학자가 임종을 앞둔 이들을 대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직한 태도 등을 설명하는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뒤 영국의 저널리스트 출신 데렉 험프리와 함께 미국의 선구적인 존엄사 옹호단체 ‘헴록 소사이어티(Hemlock Society)’를 설립, 8년 동안 의장을 맡는다. 험프리는 불치병 아내의 자살 결심과 실행 과정을 기록한 진의 길(Jean’s Way, 1978)과 마지막 출구(Final Exit),1991 등의 저자이자 존엄사 합법화 운동의 선구적인 활동가였다.

목사 자격을 지닌 종교학자가 존엄사를 지지하는 상설조직을 만들어 리더가 되는 일이,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USC 종교학과 교수직을 사퇴하고, 노인학과 겸임교수가 된다. 험프리는 “라루는 누구도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하던 단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생의 막바지에 이른 이들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주장을 둘러싼 논란이 미국에서 막 시작되던 때였고, 당연히 뜨겁고도 예민한 주제였다. 그는 그 민감하고 논쟁적인 시기에 엄청난 조정력을 발휘하며 헴록 소사이어티를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헴록 소사이어티는 의학 법률 전문가 등과 함께 불치 환자의 상담과 존엄사 합법화 운동 등을 주도했고, 94년 오리건주가 미국 최초로 존엄사를 합법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헴록 소시이어티는 2007년 관련 단체 등과 연합, 오늘의 저 유명한 안락사 옹호단체 ‘공감과 선택(compassion & Choices)’을 만들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0월 16일자 ‘죽을 권리- 힘을 얻다(The right to die- Seizing some control)’라는 기사에서 뇌암에 걸린 뒤 오리건주로 이주해 의사의 존엄사 처방을 받은 캘리포니아의 29살 여성 브리트니 메이너드가 오는 11월 1일 자신의 삶을 끝내기로 했고, 남은 시간을 존엄사 옹호 운동에 바치고 있다는 사연과 함께 미국 사회의 죽음에 대한 전향적인 변화상을 소개했다. 미국의 경우 오리건 이후 버몬트 몬태나 워싱턴 뉴멕시코주가 존엄사를 합법화했고, 7개 주에 존엄사 법안이 계류 중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생사를 신의 선택으로 믿어온 강고한 기독교의 전통과 ‘목숨만은 신의 것’이라고 했던 사유재산권의 아버지 존 로크의 정신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며, 교회에 규칙적으로 다니는 미국의 신도 가운데 최소 20%가 존엄사를 옹호한다는 ‘공감과 선택’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기도 했다.

저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튼 이가 라루였다. ‘공감과 선택’이 오리건주의 싸움과 존엄사를 선택한 이들의 사연, 임종 과정 등을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오리건에서는 어떻게 죽는가’는 2011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탔다.

라루는 USC 노인학과 겸임교수로 25년을 재직했다. 그의 강의는 죽음의 과정과 의미, 그리고 종교적 맥락에서 본 존엄사의 근거 등이 주제였다. 그의 85년 저서 존엄사와 종교는 죽을 권리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존엄사의 공론화가 유럽에서는 조금 앞섰다. 1980년 8월 영국에서는 조지 메어(George Mair)라는 스코틀랜드 외과의사가 어떻게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라는 36쪽짜리 팸플릿을 발간한다. 책에는 다양한 자살 방법과 가정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치명적인 약물들이 소개됐다. 조지 메어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 채 마지막 순간을 생물학적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한다. 개인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책자는 존엄사의 취지에 공감하는 ‘Exit’라는 모임의 회원들에게 배부됐고, 말기암 환자 등 희망자에게는 신청 후 90일 이후에 배부함으로써 ‘결심’에 앞서 충분히 재고해볼 여지를 부여했다. 80년 9월 27일자 런던판 뉴욕타임스는 옥스퍼드대에서 열린 관련 토론회 소식을 전하며 영국의 저명한 성직자인 소퍼 경(Lord Soper)의 말을 인용했다. “그토록 열렬히 천국에 가려는 희망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 애쓰는 모습은 사실 좀 우습다. 가정을 떠나 천국에 가려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권리가 도대체 누구에게 있단 말이냐.” 라루의 헴록은 조지 메어의 책을 이듬해 출간할 방침임을 밝혔으나, 실제로 책을 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영화 ‘스타트렉’의 제작자 티모시 리어리 등의 화장한 유골이 타우루스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게 1998년이다. 이 우주장(宇宙葬)을 계기로 그 해 2월 뉴욕타임스는 흥미로운 유골 처리 사례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거기에는 재를 잉크에 섞어 책 인쇄에 쓰게 한 마블코믹북 편집자 마크 그루엔발트와 “내 집이 이웃에게 늘 열려 있기를 바란다”며 자신의 뼈를 녹여 대문 버팀쇠로 만들게 한 패트 슈레더 전 콜로라도 민주당 하원의원의 이야기가 포함됐다. 그리고 라루의 교재 이야기도 있다. 라루는 매 학기 첫 강의 때면 학생들에게 실제 사람의 뼛가루를 보여주곤 했다. 친구였던 USC 심리학과 허먼 하비 교수가 라루에게 강의 교재로 쓰라며 유언으로 남긴 자신의 뼛가루였다. 라루는 “하비는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며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들의 중요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성과 성서(Sex and the Bible)(1983) 안락사와 종교(85) 신의 역할: 당신의 죽을 권리에 대한 50개 종교의 관점들(96) 등 다수의 논쟁적인 책을 썼다.

라루는 두 차례 결혼했고 이혼했다. 전 아내 에밀리 퍼킨스는 “라루에게 인간은 하루하루 혹은 한 해 한 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죽음과 순간으로 닿아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 열정적일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퍼킨스의 말처럼 라루는 자신이 믿고 가르친 바대로 살았다. 유족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의 산소호흡기 연명치료를 거부, 그의 뜻을 존중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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