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죽은 친구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미로처럼 얽힌 세 남녀의 동상이몽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죽은 친구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 미로처럼 얽힌 세 남녀의 동상이몽

입력
2014.10.23 15:34
0 0

대학 시절 같은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정과 김, 최는 친구 A의 갑작스런 부고를 듣고 한밤중에 K시로 향한다. 상반된 유형의 세 사람이 각자의 입으로 서술하는 ‘그 밤의 몇 시간’에는, 이상하게도 일치하는 구석이 별로 없다.

정은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들 외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고요하게 들끓는 심연이 있다고 믿는 여자다. 동화작가인 그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 심연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표면만을 부유하는 그 언어들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기 때문에…소설이 없다면 그 버려진 심연들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차가 출발하기 전 김이 카 오디오로 튼 수지 서의 음악은 너무 감미로워 예의에 어긋나는 것만 같다. 볼륨을 줄이며 정이 말한다. “음악 들을 때가 아니잖아.”

김은 정의 남편이다. 한때 문학청년이었으나 졸업 후 증권사에 취직한 그에게 삶은 한 판의 게임이다. 게임에 필요한 것은 오직 집중과 전력질주뿐, 게임 바깥에 서서 판의 존재 이유를 묻는 행위는 금물이다. 그러나 김도 끝내 자신이 게임의 승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얼마 전 증권사를 나와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오디오 플레이버튼을 누르니 레이철 야마가타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한때 자신이 멘토로 여겼던 냉혈한 지점장이 좋아하는 가수다. 쓸쓸한 목소리에 가슴 깊이 슬픔이 차오르는 순간 아내가 볼륨을 줄여 버린다.

최는 대학 시절 영화 동아리의 중추였다. 마르크스와 니체와 프로이트에 빠진 최는 진지한 혈기로 가득한 청년이었다. 엊그제 A가 자신이 만든 영화의 시사회를 한다며 반 지하방에서 연 모임에서, 최는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김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의 보좌관 일을 시작할 계획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이상을 좇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대면하는 것, 그것으로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진정으로 다수를 위한 길이다…” 김이 튼 올리비아의 ‘러브(LOVE)’에 최는 혐오감을 감출 수 없다. 저 사랑을 부정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텐데…

처음부터 아귀가 이상하게 맞물린 채 출발한 여정에는 점점 더 틈이 벌어진다.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데도 라디오 일기예보는 쾌청한 날씨를 예고하고, 뉴스에서 이미 보도한 고속도로 추돌사건은 일행이 사고 지점에 도착한 순간 벌어진다. “사고가 나기 전에…뉴스가 먼저 나오나?” 이제는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도 현실의 어긋난 틈을 메울 수가 없다. 그때 도착한 문자 메시지. 발신인은 A다. “오고 있어? 빨리 와. 우리는 조용한 육체 속에서 만날 거야.”

정, 김, 최가 내비게이터에 표시되지 않는 길을 달리며 죽은 사람의 문자를 받는 동안, K시 터미널에서 합류하기로 한 또 다른 친구 염이 터미널에 도착한다. 식당에서 우동을 먹는 그의 뒤로 심야 뉴스가 흘러 나온다. 호남고속도로에서 벌어진 삼중 추돌사고로 승용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의 남녀가 숨졌다는 내용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일견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처럼 보인다. 세 사람의 상반된 진술을 끼워 맞춰 서사를 조립하려던 독자는, 끊어진 혈관처럼 누군가 이야기의 개연성을 일부러 끊어놨음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작가가 정교하게 만든 미로를 체험하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이장욱 작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 즉 가시광선 바깥의 영역을 그리는 작가”라며 “마치 하나의 흐름을 가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정교하게 흐름을 어긋나게 만드는 작가 때문에 독자들은 기어이 비존재의 세계로 초대된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로 등단.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문학수첩작가상을 받으며 소설 발표 시작. 단편소설 ‘곡란’으로 2011년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

소설집 ‘고백의 제왕’과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생년월일’ 등이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