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고전ㆍ고대의 재발견과 재해석이었다. 15세기 후반 피치노는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설립된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전 저작을 라틴어로 처음 번역해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을 인간을 중심에 둔 인문학적 사유로 바꾸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새로운 가능성을 옛 것을 다시 읽고 해석함으로써 추구하기는 건축과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건축에 관한 문헌은 단 한 권만에 후세에 전해졌다.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다. 건축이 추구해야 할 세 가지 가치로 흔히 꼽곤 하는 튼튼함, 쓸모 있음, 아름다움의 원 출처가 바로 이 책이다. 최초의 르네상스 건축가 가운데 한 명인 알베르티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를 따라 10권으로 된 건축론을 썼다. 1세기의 비트루비우스를 15세기에 맞게 읽고 고쳐 새롭게 펴 낸 것이다. 건축 이론과 실무를 한데 아우르는 이 책 제6권에서 알베르티는 “인간의 무례함과 손상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태의 우아함과 품위이다”라고 말했다. 피렌체를 좌지우지하던 메디치 가문조차 두 번이나 도시에서 쫓겨나야 할 만큼 정세가 불안전하던 시절, 적의 약탈과 파괴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축물을 성채처럼 짓는 것이 아니다. 적조차도 아낄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와 탁월한 아름다움을 지닌 건축물을 만드는 편이 더 낫다는 설명이다. 알베르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럽 유수의 건축과 도시는 정치체제의 부침, 전쟁, 경제 개발 등을 모두 거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축과 도시가 국가와 민족보다 영속한다는 말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울은 정도600주년을 자랑하며 역사도시를 자처하지만, 서울의 건축과 도시의 흔적은 시장 임기에 맞추어 허물어지고 새로 생겨나기 일쑤다. 이명박 전 시장의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가 정치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후, 정치인들은 서울의 공간을 정치적 수단의 대상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정치를 가장 큰 규모로 시각화, 미학화할 수 있는 것이 건축과 도시이니 정치인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한편에서는 뉴타운으로 서울 전역을 들쑤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강르네상스라는 스펙터클을 만들려다 중도에서 낙마한 변호사 출신 시장도 있었다. 공사일정은 예외 없이 4년 임기 단위에 맞추어져 있었고, 쏟아 부은 예산이 아까워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건물도 부지기수였다.
영속하기는커녕 한 세대를 버티지 못하고 개발과 철거를 되풀이하는 토건정치가 서울에서 펼쳐져 왔다. 이에 처음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낸 시장이 현재의 박원순 시장이다. 그는 개발에서 벗어난 보존과 재생을 화두로 내걸었다. 지나친 기우일지 모르나 재선에 성공한 뒤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인상이다.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조급함마저 비친다. 10월 초 사업을 공식화한 뒤, 지난 12일에는 고가를 44년 만에 보행자에게 개방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달 말까지 ‘서울역 고가도로 활용방안 아이디어 공모전’을 진행중이다. 숭례문, 구서울역사, 약현성당, 서소문 공원, 손기정 공원, 국립극단 등 주변 역사문화적 장소를 존중하고, 고가 상하부 및 주변 유휴지를 연계하고 각종 프로그램 및 운영과정, 기업참여 확대 방안 등을 모두 포괄하는 아이디어를 공모해, 향후 국제현상공모와 연계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불과 한 달이란 기간 동안에 말이다.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사업은 세운상가 리모델링, 한양도성 성벽 복원과 함께 서울을 보행자 중심의 입체도시화하려는 계획의 일부다. 이 사업을 관장하는 이들이 지금껏 걸어온 행보를 미루어보면, 서울을 보행자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여러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전의 스펙터클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공간 자체가 정치적 이전투구의 장이기에 이 모든 계획 역시 건축 이전에 정치 행위이다. 그들의 선의는 언제든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오해될 수 있다. 이를 불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알베르티가 말한 탁월함을 성취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공과 시간을 들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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