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100kg 견뎌야' 조항 느슨한데 안전펜스 등 가이드라인도 없어
지하철 환풍구 74%가 지상 노출 '㎡당 500kg' 하중 기준 강화해야
19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오전 11시 열리는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러 외국인을 비롯한 100여명의 구경꾼이 행사장 주변을 에워쌌다. 행사가 시작되자 뒤편에 자리잡은 몇몇 관람객들은 교대식을 자세히 보기 위해 인근에 설치된 2개의 환풍구 위로 올라섰다. 환풍구 덮개 밑은 족히 10m는 될 법한 낭떠러지였으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관람객들은 환풍구 위에 올라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환풍구 높이는 지상에서 각각 30㎝, 60㎝ 정도여서 올라가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행사 관계자는 “평소에도 10명 정도는 환풍구 위에서 행사를 구경해 특별히 제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7일 16명의 사망자를 낸 경기 판교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사고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환기시설이 언제든 ‘죽음의 구멍’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보행로처럼 환풍구 위를 자유롭게 다니는 게 현실인데도, 애초에 사람이 올라서는 시설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중 기준은 느슨하기 짝이 없다. 접근을 막지도 않고, 무게를 버티지도 못하는 환풍구가 죽음을 부른 것이다.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한 ‘건축물의 설비기준 등에 관한 규칙’은 ‘지하 면적 1,000㎡ 이상 건물은 환기성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물(환기구 등)이 필요하다’ 등 환기 용량만을 규정할 뿐 시설물의 높이, 형태, 두께, 재질 등 안전 관련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다. 국토부 고시에 ‘㎡ 당 100㎏의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이 기준을 준용해도 판교 참사는 막을 수 없었다. 환풍구 면적이 15㎡인 점을 감안하면 최대 1.5톤의 하중밖에 견디지 못해 기껏해야 성인 20여명의 몸무게를 지탱할 뿐이다. 이번처럼 약 40명의 성인들이 동시에 올라설 경우 사고를 막을 길은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건축물 전체로 보면 주차장 환풍구는 지붕에 해당하는데 지붕에 올라가는 것을 전제로 하중을 계산하지는 않는다”며 “또 건축주에 따라 건물 형태가 제각각인 만큼 환풍구 설치기준도 일일이 다 규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정은 덜하지만 지하철 환풍구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현재 서울에 있는 지하철 환풍구 2,418개소 중 접근성이 높은 지상 노출 환풍구만 73.5%(1,777개소)에 달한다. 지하철 환풍구 역시 역사 설계도에 따라 위치와 깊이 면적 등을 정하기 때문에 일률적 설치 규정은 적용받지 않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매달 한 두차례씩 지하철 공사가 시설물을 점검하지만 별도로 환풍기만 살펴보지 않고, 오물 유입 등 청소 상태나 빗물 유입 가능성 등 내부 점검에 좀 더 중점을 둔다”고 설명했다. 지하철 환풍구는 하중 기준이 ㎡ 당 500㎏로 건축물 환풍구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보행에 불편을 준다며 턱이 있는 지하철 환풍구를 보도 높이와 같은 평면 구조로 바꾸는 사업을 시행 중이어서 하중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박재현 인제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주차장이든 지하철이든 환풍구 설치 규정에 안전 가이드라인 자체가 없다는 게 문제”라며 “안전펜스 등 접근을 봉쇄하는 장치를 만들어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18일 각 시도에 관내 건축물의 환기구조물에 대한 안전점검을 부랴부랴 지시했다. 하지만 각 건물의 설계ㆍ시공을 담당한 건축주에게 후속 조치를 일임한데다, 환풍구를 높이는 등 안전 확보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여전히 없는 상황이다.
세종=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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