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이 말들은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입력
2014.10.16 20:00
0 0

시대가 어떻더라도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연애의 물결은 세상의 중심에서 파문이 된다. 가을이어서 연애를 하고 겨울이어서 사랑을 하고 봄이어서 껴안는다. 그리고 어떤 사랑은, 어떤 연애는 이별이라는 이름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은행잎 쌓이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 라는 소리가 있다.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서 한두번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일 것이다. 글쎄, 그것이, 그렇게까지 될까 싶은 의문도 없지는 않으나 그런 의문을 가질 때 누군가는 소리치며 ‘나, 거기 갔다가 깨졌잖아요’ 하며 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왠지 그런 곳이라면 아무리 급한 상사의 심부름이라도 혼자는 걷고 싶지 않아 뺑 돌아가곤 한다던 어느 한 사람도 알고 있다.

또 부안의 채석강이 그런 곳이란다. 왜 그런 이야기가 전해오는지 모르지만 그곳에 가는 모든 연인은 그 여행에서 돌아와 얼마 가지를 못하고 곧 헤어진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헤어질 마음이 있는 연인은 부러 그곳을 찾는 정도라고 하니 그 이유가 참으로 궁금하다. 채석강의 비극적일 정도로 빼어난 노을의 이미지와 관련하거나 오래 전 어느 기녀가 그곳에서 불렀다는 노래가 아직도 기운을 세우고 있어서일까.

또 창원의 용지 호수가 그런 곳이란다. 하늘에서 보면 호수의 외형이 ‘하트’ 모양을 닮았는데 데이트를 하러 온 많은 연인들이 호수를 한 바퀴 산책을 하면 얼마 못가 깨지고 만다는 속설이 있는 곳이다. 하트 모양이 완전하지 못하고 한쪽이 깨져 있어서 그렇단다.

도대체 누가 만든 말들이길래 이 말들은 참 믿을 수도 없고 참 안 믿을 수도 없는 말이 됐을까. 사람을 닮은 낭창낭창한 말들이며 표현들. 그런 말들은 다 누가 했단 말인가. 그런 말들은 누가 짓고 누가 퍼뜨려서 굳어지고 소용되는가 말이다.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단풍 이야기다. 요즘 단풍이 계속 남하를 하고 있는데 이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 낮밤으로 사람이 걷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같단다. 어떤 숫자로 계산하는 방법도 있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만들어가지고 이 가을 집 바깥으로 나올 때는 문득 나뭇가지들을 올려보게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 말은 아름다운 정도를 말하기에 앞서 말과 말 사이에 호흡이 배어있는 것 같고 다분히 문학적이며 그래서 매혹적이다. 이 말은, 이 근거는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것은 식물의 이름과 관련돼 있다. 백리향이라는 풀이 있는데 사실은 낮게 자라는 나무의 일종으로 주로 높은 산에서 자란다는데 이 식물의 향은 가을 풀향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단지 식물의 냄새만이 아닌 동물적인 냄새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데다 진하고 또 강렬해 늦은 밤 책상에 앉은 사람, 마음이 허전한 사람, 종일토록 기력이 없는 사람을 자극하는 데 직방(直放)이다. 백리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발 끝에 붙은 향기가 백리를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세상에나. 다른 데 넣어둔 향기도 아니고 발 끝에 붙은 향기라니. 표현 참 아찔하다. 이 이름에 과감히 비과학을 이어붙인 것은 또 누구일까. 잘 모르긴 해도 사람이 꾸미고 벌이는 일일터.

이 최대한의 확장은 과연 인간의 심장이 벌여놓은 일일까. 이 많은 말들은 누가 지어 다시금 듣는 이로 하여금 심장이 뛰게 하는가 말이다.

세상 모든 소리가 심상찮게 들리면서 다시금 확장되는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의 특장이겠지만 자꾸 이러다 세상에 믿지 못할 소리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물론 그런 소리가 시(詩)에만 있어서도 아니 되겠지만 말이다.

평소 존경하는 한 번역가를 상가(喪家)에서 만나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시는지 여쭈었더니 가을이라 하신다. 왜 좋으냐고 다시 여쭈었더니 가을은 모두 끝나서 없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 좋아, 하신다.

선생님, 이 가을이 끝나기는요. 이토록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마음에다 말에다 온기를 실어 세상을 짓고 허물고 하는 작업을 열심히들 하고 있는 걸요. 이토록 단풍 든 나무 아래만 서 있어서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머리가 어질어질 하구만요. 그리고 이렇게 가을에는 사람들이 거짓말인지, 시(詩)인지 모를 말들을 자꾸 만들어내고 있는 걸요.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