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지난 12일 오후 전북 전주 한옥마을 태조로 입구는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주변 도로들은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했고 하루 종일 차량정체로 몸살을 앓았다.
불과 10여 년 전만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 슬럼가나 다름없었던 전주 한옥마을이 최근 인기를 끌면서 주말과 공휴일마다 되풀이 되고 있는 풍경이다. 2002년 고작 31만명이었던 관광객은 2006년 100만, 2010년 300만, 2011년 400만, 2013년 500만명을 돌파했고, 올해는 600만명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관광객이 몰리면서 한옥마을 안에 100여 곳이던 상가는 현재 500곳 가까이 늘어났다. 한옥마을의 훈풍은 한적했던 동문거리와 동서학동에까지 불어 어둡던 밤거리를 환하게 밝혔다. 올 들어 한국전통문화전당과 국립무형유산원이 잇따라 개원한데다 옛 전북도청 터에 전라감영 복원 계획이 발표되면서 침체된 중앙동 구도심과 남문시장 골목까지 기대 심리로 들떠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 풍남동 일원 298,260㎡에 603채의 한옥이 담장과 지붕을 맞대며 이어진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한옥마을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된 이 후 건축규제로 슬럼화가 심하게 진행됐던 곳이다. 집수리도 주인 마음대로 못하면서 빈집이 늘었고 담벼락이 갈라지는 집까지 생겨났다.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20년이 지난 1997년에야 보존지역에서 해제될 수 있었다. 한옥보존지구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한옥마을을 지나갈 때(당시에는 한옥마을 동쪽에 철도가 있었음) “보기가 좋으니 잘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뒤 지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후된 공간인 한옥마을이 달라진 건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둔 전주시가 이곳을 활성화해 관광자원으로 만들기로 하면서다. 시는 2000년부터 빈집과 공터를 사들여 체험 이벤트 공간을 늘리고 주민들에겐 한옥 개보수 비용까지 일부 지원했다. 한옥마을은 처음부터 예상 밖 성공을 거뒀다. 전국에서 한옥마을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렸고, 일본인 관광객들까지 합세했다. 몰려든 관광객에 고무된 전주시는 2008년 한옥마을 복판에 인공실개천이 흐르게 했고 주차장 조성과 도시가스 공급, 전봇대 지중화 사업, 야간경관 조경, 간판정비, 테마관광로 조성 등 각종 기반시설 정비와 확충에 예산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는 전통문화시설 건립에도 발벗고 나섰다. 판소리와 탈춤, 전통무용 등 연중 200여건의 전통공연과 70여건의 전통혼례가 열리는 전통문화관을 비롯, 공예품전시관, 전통술 박물관, 한옥생활체험관, 최명희 문학관, 소리ㆍ부채ㆍ완판본 3대 문화관 등을 잇달아 개관했다. 시는 일제강점기에 헐린 옛 전주동헌도 2010년 이곳에 옮겨와 복원했고, 한지, 한식, 서예 등의 전주 문화를 한옥마을 관광과 아우르는 ‘한(韓)스타일관광과’라는 행정조직까지 만들며 박차를 가했다.
처마의 곡선이 물결 치듯 흐르는 한옥마을에는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경기전, 한국 천주교의 순교 1번지로 불리는 전동성당, 호남에서 제일 컸다는 전주향교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이성계가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후 축하연을 벌였다는 오목대, 전주성의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풍남문, 민물고기 쉬리가 뛰노는 1급수 도심 하천인 전주천변도 가까이 있는데다 최고의 맛으로 불리는 전주 식도락여행이 가능해 관광객들의 입소문은 빠르게 전파됐다.
전주시 박화성 한옥마을사업소장은 “전주한옥마을이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한(韓)스타일 브랜드를 이용한 새로운 한국관광의 키워드로 자리잡았다”면서 “한옥마을의 성공은 전통문화의 인프라가 풍성한데다 관광마케팅이 주효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 관광객은 넘쳐나지만 한옥마을의 정체성이 급격히 훼손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옥이 품고 있는 전통과 순수 등의 가치가 사라지고 싸구려 장삿속만 판칠 경우 전주 한옥마을에 대한 평판이 급속히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광지로 시끌벅적 해지면서 살던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한옥마을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2008년 1,060세대 2,339명에서 올 9월 현재 671세대 1,412명으로 줄었다. 평생 한옥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이세중(72) 한옥마을보존협의회 고문은 “예전에는 한옥마을이 조용하고 고풍스러워 살기 좋았는데 이제는 주차불편과 소음, 음식냄새 등 주거환경이 갈수록 악화되자 원주민들이 많이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또 1,2년 전부터 한옥마을의 관광풍속도 급격히 바뀌고 있다. 전통찻집과 전통공예품 매장이 가득했던 거리를 이젠 국적 불명의 음식매장과 외국산 장신구를 파는 액세서리점들이 채우고 있다. 전통 먹거리는 찾아보기 힘들고 커피와 츄러스, 아이스크림, 꼬치구이 등의 매장들만 지천이다.
당장 내년 하반기로 다가온 슬로시티 재지정도 녹록치 않아 보인다. 예전에는 한옥마을보존협의회 회원들이 정체성을 떨어뜨리는 음식 판매는 자제하도록 권유하고 다녔는데 요즘은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옥마을을 찾는 젊은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서울 유흥가의 먹자거리와 별 다를 바 없어진 것. 대부분 숙박시설도 주인은 살지 않고 손님이 오면 방 열쇠만 주고 가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위기를 공감한 전주에선 한옥마을 관련 세미나가 잇따라 열리며 대책을 찾고 있다. 공무원은 물론 상인들까지 문제점을 공감하기 시작했으니 그 대안을 수렴해 낸다면 전주 한옥마을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극심한 교통 혼잡을 빚는 한옥마을 안의 차량 통행을 토ㆍ일요일과 공휴일 뿐 아니라 평일에도 통제하는 방안과 정체성을 훼손하는 업소 단속 등을 포함한 ‘한옥마을 수용태세 종합대책’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시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고급 관광의 시작이라며 서비스와 운영방식을 대폭 개선해‘양보다 질’로 승부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영호 전주시 관광마케팅담당은 “한옥마을에서 3년 전 관광객 1인당 쓰는 돈이 평균 5만원이었지만 올해는 20만원에 달해 매년 커지고 있다”면서 “한옥마을은 ‘대한민국 도시관광 1번지’로 집적된 볼거리, 다양한 음식, 문화체험, 접근성, 위락성 등이 뛰어나 여전히 미래 가치가 높다”고 강조했다.
시는 장기적으로 해마다 늘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 유치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10월 일본인 38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전주가 1일 여행 희망지로 1위를 차지하자 발 빠르게 지난 8월부터 서울 롯데호텔-한옥마을을 운행하는 일본인 전용 셔틀버스를 11월 9일까지 매주 금ㆍ토ㆍ일요일 운행하고 있다.
김영량(55) 한옥마을 슬로시티협의회장은“이제부터라도 기준을 세워 자정 노력도 하고 전통 먹거리와 특산물,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한옥마을의 미래는 밝다”면서“한옥마을 같은 관광지는 전국적으로 드물고, 젊은 층이 몰린다는 점이 지속 가능한 관광지로 남을 수 있는 좋은 장점”이라고 말했다.
전주=최수학기자 sh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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