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켓 들고 시위했던 사람들에게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에 교단이 4년 여 만에 칼을 빼는 모습이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13일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평양노회가 교회 안팎의 관심을 받은 이유였다. 2012년부터 전 목사의 목사 직 박탈을 청원해왔던 교인들이 현장을 9시간째 지키고 있었다. “피켓 들고 시위했던 사람들”이란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전 목사 고소 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은지 정치부 목사들이 1시간 20분 간 회의를 한 뒤 본회에 보고하는 첫머리, 교인들을 향해 돌연 “사과하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마음 졸이며 연단에 시선을 꽂아두고 있던 교인들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전 목사의 후임인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가 대신 사과하고 나서야 재판국 설치 등 논의가 진전됐다. “피켓시위는 죄송합니다. 오죽하면 저 청년들이 그랬겠습니까. 오늘은 꼭 전 목사 건을 다뤄주십시오.”
목사들에게 사과해야 했던 교인들이 누군가. 노회가 전 목사의 성범죄에 눈감은 지난 몇 년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준 이들이다. 숨은 피해자들을 찾아 증언을 받고 교회에 이들에 대한 치료와 보상을 요구한 사람들이다. 이진오 더함공동체교회 목사가 이들을 도왔고,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뜻있는 개신교 시민단체도 힘을 보탰다. 최근 책 ‘숨바꼭질’로 전 목사의 성추행을 다시 도마에 올린 것도 이들이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전 목사의 성추행은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날도 교인들은 회사에 월차를 내거나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노회장인 서울 영등포구 은석교회를 찾아 목사와 장로들에게 전 목사의 처벌을 호소했다. 노회장에게 “전 목사의 고소건을 꼭 처리해달라”는 의견서도 전했다. 그런데 이들의 언행이 일부 목사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목사들 아니었을까. 동료 목사의 범죄를 수년간 눈감아 피해자들을 두 번 울렸고, 개신교인은 물론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개별 교회의 일” 혹은 “처벌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며 단죄의 책임을 미뤄온 목사 집단의 온정주의를 과연 하나님은 기꺼워하실까. 당일 노회장에서 한 교인은 목사들을 향해 이런 쇳소리의 호소를 했다. “높은 도덕성 바라지 않겠습니다. 상식대로 해주십시오.” 개신교 목사들의 상식이 어느 정도인지 한달 내 나올 처벌 수위가 말해줄 터다.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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