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린 폴 장편소설 ‘벌’ 번역 출간
인도계 영국 작가 랄린 폴(사진)의 장편소설 ‘벌(권상미 옮김ㆍRHK 발행)’이 출간됐다. 뉴욕타임스의 커버스토리로 리뷰가 실렸고 2013프랑크푸르트도서전의 핫 타이틀로 각국 출판 편집자의 이목을 사로잡아, 데뷔작으로는 드물게 화려한 영예를 누린 소설이다. 영미소설의 거목으로 꼽히는 캐나다의 마거릿 애트우드는 “키츠의 시어로 쓴, 원탁의 기사를 닮은 신데렐라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치밀한 묘사와 대담한 상상력으로 작가가 그려낸 벌들의 사회사는 무엇보다도 인간세계의 적확한 알레고리다. 페미니즘의 언어로 기록한 혁명의 서사라 불러도 좋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청소병 ‘플로라 717’. 엄격한 신분 카스트의 최하층민인 플로라 일족으로 태어난 일벌 717은 덩치마저 크고 못 생겼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강건한 신체적 힘과 뛰어난 후각과 감지력,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분에게는 철저히 금지된 지식에 대한 흠모가 있다. 고로 ‘수용하고 순종하고 봉사하라’가 황금의 정언명령인 벌들의 왕국에서 그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하지만 벌집 왕국이 추위와 폭우로 기아의 위협에 맞닥뜨리자 그녀는 보급병으로 신분이 상승하며 바깥 세계로 자유롭게 입출할 수 있게 된다.
왕국을 지배하는 자애롭고 성스러운 여왕벌에 대한 사랑과 충성, 부지런히 꿀을 모아 종족의 번영에 이바지하고 싶은 충정이 플로라 717에게 새로운 예외들을 허락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에게는 새로운 욕망이 은밀하게 솟아오른다. 자신도 여왕처럼 알을 낳아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발각되면 즉시 참혹하게 처형되는 생식의 욕망이다. 여왕이 질병에 걸렸다는 반역의 언어를 발설해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과 청소병 출신인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옹립하고 싶은 어머니의 욕망 사이에서 번민하는 717과,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위해 은밀히 717을 옹위하는 청소병들의 뜨거운 연대는 소설의 가장 뭉클한 장면 중 하나다.
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횡포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수벌, 일평생 신분에 따라 노역에 시달리다가 필요가 다하면 가련하게 죽임을 당하는 낮은 계급의 일벌, 여왕을 모시면서도 훗날의 권력을 도모하는 사제들과 경찰병 등 실로 다양한 계급과 층위의 존재들이 다채로운 갈등과 연대의 관계를 맺는다. 웅대한 세계관으로 조망하고 세심한 솜씨로 구축한 벌집의 세계와 벌들의 감정 속으로 이물감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관능으로 점철된 시적 문장의 힘이 탄탄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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