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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ㆍ사회주의 경계 넘어 사회를 치료한 경제학자

입력
2014.10.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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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천재 경제학에 눈뜨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실천 부담, 의예과서 수학과로 진로 변경

美서 성장이론 세계적 대가로

모든 근대 경제학이 놓친 환경ㆍ문화 등 포괄하는

'사회적 공통자본' 등 발표

노벨 경제학상 단골 후보

신선하고 충격적인 저술 활동, 경제이론 벗어나 현실 속으로

우자와 히로후미는 성장이론 분야의 세계적 경제학자로서 근대 경제학의 한계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비판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계량경제학의 회장까지 지낸 수리경제학자였지만 사회를 설명하는 수학적 도식보다 서민적 삶의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2009년 일본 고마자와 대학 강연 당시의 우자와.
우자와 히로후미는 성장이론 분야의 세계적 경제학자로서 근대 경제학의 한계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비판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계량경제학의 회장까지 지낸 수리경제학자였지만 사회를 설명하는 수학적 도식보다 서민적 삶의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2009년 일본 고마자와 대학 강연 당시의 우자와.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ㆍ새로운 혁명)’이 발표된 게 1891년이다. 교황은 19세기의 10년을 남겨둔 인류가 20세기를 맞이하며 감당해야 할 숙제와 지향을 밝힌 그 회칙의 뼈대를 ‘자본주의의 폐해와 사회주의의 환상(Abuses of Capitalism and Illusions of Socialism)’이라는 함축적인 표현 안에 담았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91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이름의 새로운 교황청 회칙 ‘뉴 레룸 노바룸’을 내놓는다. 공산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확연해진 문명사적 전환기였다. 바오로 2세는 회칙에 레오 13세의 구절을 뒤집은 ‘사회주의의 폐해와 자본주의의 환상’이라는 예언적인 표현을 굵은 글씨로 담았다.

바오로 2세가 회칙을 준비하면서 자문을 청한 외부인사가 있었다. 교황청 회칙 작업에 참여한 첫 외부인사로 알려진 그가 일본의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宇澤弘文)였다. 그는 그 해 바티칸이 주최한 ‘경제학의 사회적ㆍ윤리적 전망’ 콜로키움에서 교황을 만났다고 한다. 그 작업에서 우자와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학문과 삶이 바오로 2세 회칙의 저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자와는 세계적인 경제학자로서 강단의 경계를 넘어, 다시 말해 학자로서 그에게 보장된 안정적인 진로를 벗어나 시대와 사회의 맥락 안에서 학문의 역할과 의미를 찾고자 했던 지식인이었다.

이야기를 더 이어보자. 1994년 우자와는 저서 사회적 공통자본(Social Common Capital)(2008, 이병천 역, 필맥)에서 20세기 세계경제와 경제학의 흐름을 일별하다 80년대 신자유주의 대목에 이르러, 능청스럽게도 “그때 우리 경제학자들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문서가 나왔다”며 바오로 2세의 회칙을 꺼낸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문제의식을 넘어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을 만한 경제체제가 무엇이냐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로마 교황의 문제제기에 대해 우리 경제학자들은 겸허하고 성실하게 대응해야 한다.”

신고전학파의 산실인 케임브리지와 케인즈학파의 보루 프린스턴대,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아성으로 꼽히는 시카고대 등서 두루 교수와 펠로를 지낸 우자와 히로후미 전 도쿄대 명예교수가 9월 18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그는 성장이론 분야의 세계적 수리경제학자로서 자신이 연구한 모든 근대 경제학이 놓친 현실들, 예컨대 환경과 문화 등을 포괄하는 경제학 너머의 경제학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사회적 공통자본’도 그 노력의 한 결실이었다.

사회적 공통자본은 20대 프린스턴대 시절 그에게 큰 학문적 영감을 준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 등의 ‘제도주의(Institutionism)’ 개념에서 발아했다고 한다. 제도주의 경제학이란 자본주의 경제가 경제적 요인들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법률 관습 등을 포함한 각종 제도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경제분석 역시 다양한 제도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의 경제학이다. 그만큼 개별 사회의 특수성을 중시한다. 사회적 공통자본은 “한 나라 또는 특정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우수한 문화를 전개하며, 인간적으로 매력 있는 사회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장치”다. 거기에는 대기 삼림 하천 등 자연환경과 도로 상하수도 전력 등의 사회 인프라, 그리고 교육 의료 사법 금융 등 제도자본이 포함된다.

모든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충족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사회 전체의 공유자산(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소유와 관리는 사적 자본의 이윤 동기에 맡겨서도 안 되고 국가가 정한 기준이나 규칙에 따라 운영돼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우자와는 “각 분야의 직업적 전문가가 전문적 식견에 기초해서 직업적 규율에 따라 (사회적 공통자본을) 관리, 운영해야 한다”고 썼다. 위탁이 아니라 신탁(fiduciary), 즉 관리 주체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으로 운영 관리하되 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고, 정부는 전문가들이 신탁 원칙에 따라 제대로 관리 운영하는지 감독하고 사회적 공통자본들 사이의 재정적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거였다. “제도주의 경제체제에서 정부가 수행해야 할 경제적 기능은 통치기구로서의 국가의 기능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소득과 주거지 등을 불문하고 누구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누리는지 감시하는 기능이다.”(책 27쪽)

그는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신고전주의 이론의 허술함이 드러나고 다시 70년대 세계경제 위기와 혼란으로 케인즈 이론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소위 ‘경제학의 두 번째 위기’를 맞아 극단적으로 보수화한 학계의 흐름을 ‘역사의 뒤틀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우자와는 1928년 7월 21일 일본 돗토리(鳥取)현 서부 요나고(米子)시에서 태어났다. 4살 무렵 교사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도쿄로 나온다. 학문(학자) 정보 사이트인‘퀘스티아’에 올린 그의 수필에는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의 추억 하나가 소개돼 있다. “당시 선생님은 2,600년 전 진무 텐노(神武 天皇)의 전설로부터 시작되는 일황 가계 역사를 자랑스럽게 가르치곤 했는데, 어느 날 내가 손을 들어, 나로선 너무나 자연스러운 질문을 했다. ‘만일 황제의 장남이 바보면 어떻게 되나요?’ 어떤 벌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얼굴이 분노로 벌개졌던 건 선명히 떠오른다.” 장남이 모든 가산을 물려받고, 둘째부터는 아들 없는 이웃집 양자로 들어가는 게 유일한 희망이던 시절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무렵 그는 명문 도쿄 제1중학교 학생이었고, 1936년 학교 인근에서 발발한 ‘2.26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황도파 젊은 장교들이 쇼와(昭和) 천황이 직접 통치할 것을 주장하며 부패 관료들을 살해하고 수상 관저를 공격한 이 사건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고, 군부 강성파(일명 통제파)가 권력을 쥐는 계기가 된다. 이듬해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교사 누구도 그 사건에 대한 우자와의 의문을 풀어주는 이가 없었고, 직접 도서관 등을 다니며 자료를 찾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교육에 아주 비판적이었다.

우자와는 모범생이었고 특히 수학에 뛰어나 중3 무렵 이미 뉴턴의 정리를 수학적으로 혼자 검증할 수준이었다고, 그래서 도쿄대 수학과에 진학했다고 1998년 6월 케임브리지대 저널(거시경제동학)이 마련한 석학 인터뷰에서 말했다. “옛 일본 교육제도 하에서 처음에 나는 의예과 학생이었고, 당연히 의대로 진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읽고 마음을 바꿨다. 선서를 보자니 의사는 영리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무엇보다 환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고 돼 있더라. 나로선 전공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그게 수학이었다.”

학부를 마친 뒤 학과의 특별연구원으로 2년간 재직하며 군역을 면제받는다. 경제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그 무렵부터였다. 전후 황폐한 일본 경제의 현실-가난과 불평등, 인플레, 실업- 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였다. “수학만 연구하며 맘 편히 지내기 힘들었다. 의사가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듯 경제학자가 돼서 사회를 치료하자는 생각을 했다.”

경제학을 독학하던 시절, 그가 구할 수 있는 책은 대부분 마르크스 경제학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 구제고(舊帝高ㆍ대학 예비과정, 전후 도쿄대 교양학부로 편입)를 함께 다닌 중국인 학생들로부터 마오쩌둥(毛澤東)의 사상과 이론은 귀동냥해둔 터였다.(만주전선에서 게릴라로 곤욕을 치르던 일본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인 학생들을 선발해 일본학생들과 함께 수학케 했는데, 우자와는 오히려 그들이 마오의 철학과 정치이념을 일본인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97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고 수긍하기도 힘들었어요. 당시 나는 일본공산당에 가입하려던 참이었는데, 먼저 당원이 된 한 친구가 어느 날 말하길 내 빈약한 마르크스 경제학 지식으로는 입당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 직후 대학 연구원직을 사직하고 경제학 공부에 몰두했죠. 몇 년 뒤에야 그런 시험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친구가 그 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게 나를 구한 셈입니다.”

그는 고교시절 럭비부에서 인연을 맺은 한 도쿄대 경제학과 교수의 스터디그룹에 나가기 시작했고, 방학 강좌로 매년 방문하던 한 스탠퍼드대 교수의 강의(54년)를 들었고, 그가 케네스 애로우(72년 노벨경제학상) 교수의 미발표 원고들을 소개했고, 그 원고들을 감명 깊게 읽고 또 거기서 처음 경제학에 수학이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자신의 견해를 담은 짧은 원고를 애로우 교수에게 보냈는데 금세 스탠퍼드에서 초청장이 날아왔고…. 그는 56년 여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난다. 그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발전이론 분야의 ‘two sector model’도 스탠퍼드 시절 쓴 논문이었는데, MIT 밥 솔로우(87년 노벨상) 교수의 ‘one sector model’을 개량한 거였다고 한다. 그는 65년 시카고대로 학교를 옮긴다. 조셉 스티글리츠도 그 무렵 우자와의 강의를 들었다. 94년 3월 ‘보스턴글로브지’는 60년대 성장이론 분야의 최고 학자들을 소개하며 “65년 여름 MIT의 우수한 학생들은 모두 시카고대학을 향했다. 솔로우 이래 수리 성장이론 분야의 최고 대가였던 우자와 히로후미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운운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우자와의 저서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를 번역한 한림대 한림과학원 일본학연구소 김준호씨의 역자후기)

하지만 당시는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이 미국 대학가를 휩쓸던 때였고, 그 전쟁이 우자와의 운명도 흔든다. 우수한 학생들이 아예 미국을 떠나거나 감옥에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67년의 한 학생을 기억한다. 보수적인 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그 학생이 ‘밀워키 14’멤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밀워키 징병사무소에 들어가 징병영장을 전부 태운 14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거다. 그 학생은 7년형을 선고 받았고, 대학도 경제학도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그가 예외적인 학생은 아니었다.”그는 66,67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잠깐 머문 뒤 귀국, 69년 도쿄대에 자리를 잡는다.

귀국 후 그가 처음 쓴 책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74년)이었다. 당시로선 신선하고 충격적인 발전의 이면, 즉 70년대 광화학스모그와 시민의 위협받는 안전 등을 폭로한 책이었다. 근대경제학을 반성적으로 고찰한 근대경제학의 재검토- 비판적 전망(77)이란 책도 썼다. 농지 위에 활주로를 닦아 나리타공항을 국제공항으로 확장하려던 일본 정부의 계획에 맞서 66년부터 20년 넘게 싸운 산리즈카 마을 주민들의 투쟁을 일본 경제 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환기시킨 나리타란 무엇인가- 전후 일본의 비극(92),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95) 일본의 교육을 생각한다(98) 등등 그의 저술활동은 경제이론의 경계를 벗어나 현실 속으로 뻗어나갔다. 일본 출판업계의 거물인 이와나미 문고의 편집자 출신 전 사장 오쓰카 노부카즈(大塚信一)는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자동차… 출간 이후 우자와가 감당해야 했던 괴롭힘과 협박, 나리타… 이후 몇 년간 외출할 때마다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70년대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열린 한 연구회 일화도 있다. 당시 우자와는 근대경제학의 모델과 수식으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명쾌하게 분석해 경제ㆍ사회학자들을 매료시킨 뒤 칠판에 커다란 X표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모델로는 일본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 파괴나 공해 등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 모델에는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벨 경제학상의 단골 후보였다. 하지만 시카고대나 MIT, 프린스턴의 강단 학자들이 그의 ‘이질적인’연구와 사회 활동을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의문이다. 어리석은 가정이지만, 만일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했다면 사정은 달랐을지 모른다. 물론 그가 노벨상이나 자신의 사정에 구애됐을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썼듯이 우자와는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예비 의학도 시절 히포크라테스 선서 앞에서 좌절했던 기억을 간직했다고 말했다. 길다면 긴 생을 청년기의 어떤 기획 속에 두고 마름질하듯 주무를 수는 없겠지만, 경제학자로서 그의 마음 속에는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자’로서의 자신만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없었지만, 사회를 위해 자신에게 더 유리한 자리를 포기했다. 학문의 보수적 경계를 넘나듦으로써 자신이 설정한 경제학자로서의 경계를 지킨 거였다. 그건 어떤 상으로도 보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야심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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