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다 보니 여기저기 밀린 공연과 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4월세월호 사건 이후 대부분의 공연들이 잇따라 취소되는 바람에, 가을에 대거 행사들이 몰린 탓일 것이다. 사실, 상실의 시대에 축제라는 겸상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무력감과 상실감속에서 나 역시 한동안 창조적인 작업을 해나갈 수 없었다. 최근에야 이러한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준비하고 있는 음악극 ‘도하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 극의 부제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자들의 꿈에 관한 소극’이다. 제목에서 떠올려지듯이 음악극 도하가는 신 공무도하가(新 公無渡河歌)의 알레고리(allegory)를 활용한 작품이다. ‘공무도하, 공경도하…’로 알려진 설화에서 음악과 극의 시적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무대는 최대한 간결하고 상징적으로 구성됐다. 무엇보다 이 극은 다크 코미디(dark comedy)의 형식을 지향한다.
다크 코미디란 엘리자베스 1세 말~ 제임스 1세 대관식 시기에 셰익스피어를 통해 유행하게 된 극의 구성인데, 당시로서는 새롭게 시도된 장르다. 기존의 설화나 이야기 구조는 유지하되, 관객들에게 동시대의 새로운 문제들을 던지는 형식이다. 기존에 유행했던 카타르시스를 통한 감정적 정화와 다른 새로운 희극적 발상이었다. 평론가들은 이를 ‘문제극 (problem play)’이나 블랙유머라 부르곤 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저승사자가 백수광부를 데리러 가기 위해 이승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저승사자는 백수광부가 권하는 술에 취해 그를 놓쳐 버린다. 백수광부가 술에 취한 저승사자를 남겨두고 먼저 강을 건너 저승으로 가 버린 것이다. 자신이 데려갈 백수광부를 놓친 저승사자는 불구가 됐고, 그 몸은 구천에 떠도는 음악이 된다. 이제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동안 자신이 데려갈 몸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데려가 줄 그 몸을 찾아 떠돌아야 한다. 누군가 몸을 잃어버린 저승사자를 깨우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서 작품은 쓰여졌다.
어디서 시작된 적도 없고 한번도 도착한 적도 없으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듯한 음악 속에서 백수광부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와 술에 취한 저승사자만을 남겨 둔 채 가버린 백수광부 그리고 그 사이의 백수광부 처의 혼몽하고 아릿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저승사자는 이 작품에서 중요한 메타포를 던진다. 원래 공무도하가에는 저승사자라는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무도하가의 변주적 형태를 살피면 이별과 별리의 서정에 초점이 가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백수광부는 왜 젊은 아내를 두고 저 강을 건너갔을까? 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나는 그를 데리러 올 저승사자가 필요했다. 그것은 내게 하나의 음악에 가까운 착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극에서 저승사자는 하나의 음악이다.
이 극은 저쪽으로 건너가는 자들 뿐만 아니라 이쪽으로 건너온 저승사자(음악)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극의 음악적 형식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고민되었으며 작사의 구조는 전형적인 음악극에서 많이 도입되는 ‘A-A-B-A’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작사 의도는 존재하는 고대 공무도하가의 별리곡적 형식을 감안해서 쓰였다.
소리, 울림은 어딘가로 흐르고 있는 음악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극은 공무도하가를 새롭게 각색한 것이다. 이 극은 물, 술, 꿈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극은 이승과 저승 그리고 중천에 관한 이야기다. 이 극은 저승으로 건너가는 자(백수광부와 그의 처)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이 극은 이승으로 건너온 자(저승사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극은 서로 만나지 못하는 백수광부, 처, 저승사자 각각의 이야기이며 그들이 각자 꾸는 한 편의 꿈 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극은 세 사람의 성[性)에 관한 농밀한 고백이기도 하다.
드라마와 함께 음악은 어딘가에서 흘러와서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서 음악은 사람이며 저승이며 꿈이며 술이며 연기의 인연 같은 것이다. 나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달래고 싶었다.
김경주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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