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헤퍼넌 지음ㆍ김학영 옮김ㆍ푸른숲 발행ㆍ404쪽
요즘 부쩍 깜박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사람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은지는 오래됐고, 검색엔진을 켜놓고도 뭘 검색할지 까먹기 일쑤다. 인증번호나 전화번호 등 간단한 숫자를 외어야 할 땐 고도의 집중력을 쏟아야 한다. 나이도 있고, 그간 퍼 마신 술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라도 그 정도 뇌의 마모는 각오해야 한다지만 조금씩 불안해진다. 단순 암기력 등이야 그렇다 치지만 과연 내가 세상을 제대로 읽고는 있는 걸까 걱정이 앞선다. 나는 나의 뇌를 믿을 수 있는 걸까.
‘의도적 눈감기’의 저자인 마거릿 헤퍼넌은 인간이 왜 위기를 자초하는 행동을 되풀이하는지 연구하다 뇌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뇌는 대단히 정밀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허점투성이다. 저자는 여러 실험과 연구를 통해 뇌의 의도적 눈감기의 결과로 우리들 앞에 크고 작은 사건과 위협들이 닥친다는 것을 밝혀냈다. 보고도 못 본 척할 뿐 아니라 심지어 아예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깨끗이 잊어버리려는 뇌의 비겁한 속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아무도 볼 수 없게 진실을 감추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빤히 보이는데도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거나 캐묻지 않는 것이다. 의도적 눈감기는 특별히 해가 되지 않고 때론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드는 그 메커니즘이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험으로 내몬다. 우리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에조차 안전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견해보다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정보들을 찾는 데 두 배 정도 더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 불편할 것 같고 내 신념을 흔들어놓을 것 같은 사람들이나 정보, 일이나 장소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공감하지 않는 신문이나 방송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찾아보는 이유다.
책은 의도적 눈감기를 강물이 흐르며 서서히 강바닥이 깊어지는 과정으로 비유했다. 매우 적절한 묘사다. 비슷한 생각의 사람들과만 교류할수록 강물은 더 빠르고 거침없이 흐르며 강바닥은 점점 더 깊어지고 강둑은 더 높이 올라간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효율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기분은 좋다. 단지 강둑 너머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의도적 눈감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금융위기가 일어난 이유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책은 그린스펀의 의도적 눈감기가 상상을 초월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시장의 작동 방식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봤다. 그는 시장이 스스로 규제하기 때문에 금융모델들이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그린스펀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났다.
비정하리만큼 현실적이고 수학적인 분석가들은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규제나 경제모델 따위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세계적인 상황 때문에 금융이 실패했다는 식의 변명도 완전히 배제했다. 그들이 보기에 잘못된 것은 문화였다. 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와 같은 위험도 마찬가지다. 그 위험을 직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도적 눈감기를 부추기는 모든 권위들은 물 속의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처럼 일제히 작동한다. 우리는 우리와 닮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소비 습관을 공유하면서 그 대가에 눈을 감는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지금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린 뇌의 조종을 받아 그대로만 따라야 하는 걸까. 다행스러운 건 신경과학이 제시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죽는 순간까지 우리 인간은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 훈련만으로도 뇌의 작동 방식을 바꿀 수 있고, 우리는 뇌 안의 마스터 컴퓨터에 따르도록 자동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모든 지혜가 그렇듯, 보는 것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알 수 있고,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뇌가 더 망가지기 전, 내 뇌의 온전한 건강을 챙기기 위해, 나태해지려는 뇌와 부단한 싸움을 벌여야 할 것 같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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