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배경 소설 '들불'이 원작, 광기에 밀림 떠도는 병사 의식 추적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돈없어 대형 배우 못쓰고 내가 주연"
“전쟁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신작 ‘노비’를 들고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일본 감독 쓰카모토 신야(54)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힘 주어 말했다. 인간과 도시문명, 테크놀로지와 폭력 등을 다루던 감독이 갑자기 반전을 이야기하는 건 새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 때문이다.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기도 한 ‘노비’는 현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중 하나인 오오카 쇼헤이의 ‘들불’을 각색한 영화다. 배경은 일본군의 패색이 짙은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 레이테 섬 서부전선. 폐결핵에 걸려 소속 중대에서 버려지고 의무대의 치료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뒤 광기와 피로 얼룩진 밀림을 부유하는 병사의 의식을 추적한다.
“고등학생 때 원작 소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0년 전쯤 유럽에서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영화로 만들려고 했는데 제작 규모가 너무 커 투자를 받지 못했어요. 일본에서 투자를 받는 것도 여의치 않았죠. 제 영화를 이해하는 제작자들도 모두 무리라고 했어요.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일본이 전쟁으로 처참하게 너덜너덜해지는 걸 사회 전체적으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노비’는 주인공 다무라가 밀림을 떠돌며 겪는 일들을 기승전결의 흐름 없이 조각조각 보여준다. 1959년 이치카와 곤 감독이 같은 원작을 각색해 만든 영화가 인물들의 관계, 에피소드 내의 사건을 뚜렷이 보여줬던 것과 달리 쓰카모토 감독은 상징과 이미지에 집중했다.
쓰카모토 감독의 이전 영화들이 그렇듯 ‘노비’에도 신체 훼손 장면이 빈번하다. 그러나 그는 같은 표현이라도 이번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썼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충격적인 걸 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SF나 공포영화 같은 장르를 통해 그걸 오락적으로 즐기게 해줘야겠다는 느낌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이번엔 다릅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며 ‘진짜 싫다’ ‘보기 싫다’고 느꼈으면 합니다.”
그는 연출뿐 아니라 촬영, 편집, 각본, 제작, 미술 등을 도맡아 하는 전방위 예술가다. 전문 배우 못지않은 연기력을 자랑하며 영화와 드라마 수 십 편에 출연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주인공 다무라를 직접 연기했다. “규모가 큰 영화라면 아사노 다다노부나 ‘심야식당’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가오루 같은 배우를 쓰고 싶었지만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한 영화라서 제가 출연해야 했습니다.”
쓰카모토 감독은 전쟁의 참상을 잊어가는 일본 사회에 우려를 표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전쟁을 찬성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미군이 세계에서 하는 전쟁을 일본 자위대가 협력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추진 중입니다. 일본은 전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간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서 잘 지켜왔는데 미국이 오라고 해서 누굴 죽이는 순간 그 동안 지켜왔던 게 깨져버립니다. 절대 안 된다고 확실히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쓰카모토는 상업성과 잘 타협하지 않는 감독이다. 전설적인 컬트 영화이자 사이버펑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철남’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제안도 독립영화로 만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일까. 차기작 계획을 물었더니 회의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머릿속으론 여러 작품이 있는데 이번 영화로 자금이 회수되지 않는 한 힘들 것 같습니다.”
부산=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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