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은 서원(書院)이었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유학에 큰 업적을 남긴 선현(先賢)들을 제향(祭享)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을 강구하고 후학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남송의 주희(朱熹), 곧 주자(朱子)가 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연 것을 본떠서 경상도 영주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운 것이 시초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주희가 최초로 백록동서원을 설립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백록동서원은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여산(廬山) 오로봉(五老峰) 남쪽 자락에 있는데, 오대십국(五代十國ㆍ897~979) 때 남당(南唐ㆍ937~975)의 학자였던 이발(李渤) 형제가 처음 시작한 것이었다. 백록선생으로 불렸던 이발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이를 ‘여산국학(廬山國學)’, 또는 ‘백록국학(白鹿國學)’이라고 불렀다. 남당이 멸망한 후 여산국학은 폐허가 되었다가 송(宋)나라가 들어선 후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국자감(國子監)에서 발행한 구경(九經) 등을 내려주면서 크게 활기를 띄어 학생들이 근 1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번창했다. 그래서 백록당서원은 숭양서원(崇陽書院)ㆍ악록서원(嶽麓書院)ㆍ저양서원(雎陽書院)과 함께 천하의 사대서원(四大書院)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의 금(金)나라가 흥기하면서 또 쇠퇴하고 말았다. 그 후 남송의 주희가 1179년 남강태수(南康太守)로 부임해 이곳을 방문했는데 학생이 불과 10여명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쇠락한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주희는 새로 건물을 짓고 농지를 마련하고 각지에 도서 헌납을 요청하는 문서를 발송해서 백록동서원을 재건했다. 그 결과 백록동서원은 ‘해내(海內) 제일서원’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니 주자는 백록동서원의 중건자이지 창시자는 아니다.
그런데 조선의 서원은 초기부터 강한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조선에서 서원을 설립한 주체들은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림(士林)이었는데, 이들이 조정을 장악한 훈구(勳舊)세력과 사화(士禍)로 불리는 치열한 권력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파의 세력기반으로 서원을 설립한 것이다. 성균관과 사학(四學)같은 관학을 훈구세력이 장악하자 사림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할 연구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원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연구와 교육도 위해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시초였다. 그런데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자리는 안향이 어렸을 때 공부했던 숙수사(宿水寺) 자리였다. 불교 사원을 유학 서원으로 바꾸는 것은 독단적 사고에 빠진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애용하던 방법이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명종 5년(1550) 2월조는 “궁중에 있는 서적을 풍기 백운동서원에 나누어주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내렸는데, 군수 이황(李滉)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퇴계 이황의 요청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이란 친필간판을 내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사서오경(四書五經) 같은 서적들과 노비들도 내려주었는데, 국가로부터 공인 받은 이런 서원들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한다. 서원은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크게 늘어나 명종 때 29개에서 숙종 때는 577개로 크게 증가했다. 한 도에만 무려 80~90개에 이르기도 했다. 서원이 남설(濫設ㆍ마구 설립됨)되자 조정에서는 한 개 현(縣)에 한 개의 서원만 설치하게 제한했고, 그 결과 영조 때는 전국에 300여개의 서원만 남게 되었다. 서원을 경쟁적으로 설립한 것은 많은 특혜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서원이 소유한 서원전(書院田) 중 3결(結)에는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서원에 소속된 학생들은 군역(軍役), 즉 병역이 면제되는 특전도 누렸다. 그러자 군역면제를 위해 너도나도 서원으로 몰려들면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숙종 33년(1707) 국가로부터 공인 받은 사액서원은 20명, 비사액서원은 15명까지만 원생으로 인정해 군역면제의 혜택을 주는 것으로 한정했다. 이처럼 서원은 선현 제향과 연구 및 후학 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특권 집단화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필자는 전국 각지의 서원을 답사하면서 이들이 대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학문이 사라진 자리를 권력과 이권이 채웠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새로운 시대 조류를 받아들이는 대신 이를 막는 수구(守舊)의 본거지가 된 것도 대학으로 발전하는 대신 폐허로 변한 요인이란 생각도 들었다. 국립대 초빙 석좌교수 중 3분의 1이 관료ㆍ정치인ㆍ기업인이란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강의 한 번도 안하고 억대까지 챙겨간다니 석좌(碩座)라는 고상한 말 대신에 로비교수 제도를 신설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대학들, 점차 조선 후기의 서원을 닮아간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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