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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구체적인 꿈

입력
2014.10.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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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한 달 가량을 이사 준비로 바빴다. 살 집은 고쳐야 될 게 많았고 살던 집은 버려야 할 게 많았다. 그 동안 무신경하게 살다가 새삼 살던 꼴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꼴이 아니었다. 안되겠구나 신경을 써보자 하고 도배며 마루며 부엌과 화장실에 관심을 가져봤다. 그런데 이게 막상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진다. 무슨 놈의 도배지 종류가 이리 많단 말인가. 수도꼭지, 책장, 책상, 거실장, 붙박이 무엇 하나도 한 종류가 없었다. 나에게 너 바보냐?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야말로 종류가 많더란 말씀.

다들 아시겠지만 혹시나 하여 일단은 마루 까는 과정을 잠깐 소개한다. 일단 형편을 생각한다. 다음에 장판이냐, 마루냐를 정한다. 업자를 결정한다. 실측한다. 어느 회사 제품을 쓸 것인가 결정한다. 색상을 결정한다. 날 잡아서 깐다. 아니다. 하나가 빠졌다. 마루를 깔 수 있는 집인가 검토한다. 내 경우는 방 하나가 습기가 많다고 못 깔았다. 그냥 들어보면 만만한 일이 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안 그렇다. 변수가 많다. 그리고 결정할 것이 많다. 박력 있게 팍팍 밀고 나갈 수 없는 순간들이 많다. 왜일까. 내가 주저하고 결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꿈이 없어서다.

마루를 고민하기 전에 기필코 집을 고민해야 했었다. 어떤 집에서 살고 싶은가를 충분히 고민했다면 내가 하는 순간순간의 작은 선택들은 그야말로 별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큰 그림이 없었다. 막연하게 형편에 맞는 집이 다였다. 그러면 형편 따라 가면 되었을 텐데 내 머릿속과 눈이 그 형편을 계속 외면했다. 예산은 계속 올라가고 욕심은 끝이 없었다. 유혹이 나를 향해 뻗쳐올 때 마다 나는 여지없이 흔들렸다. 연출이 직업인 내가 그리도 용단을 못 내리다니.

또 있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 꿈이 없으면 계획이 틀어질 때 방향을 못 잡고 원망하기 바쁘다. 샤워부스가 간지가 안 나왔다. 유리패널을 붙잡는 철봉을 고정할 데가 마땅치가 않았다. 적당한 자리는 한 군데 밖에 없는데 거기는 샤워기 손잡이와 부딪쳤고 모양도 사나웠다. 나는 욕실의 모양새를 원망했다. 그런데 그 집은 내가 살 집으로 이미 선택이 끝난 상태 아닌가. 나에게는 철봉자리에 대해 관대해지는 수 말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가구들도 방에 비해 컸다. 어중간하게 몇 ㎝씩이 모자라서 끝 선이 맞지 않거나 튀어나왔다. 나는 또다시 집 크기를 원망했다. 가구는 잘못이 없었다. 아니다. 집은 잘못이 없다. 가구를 잘못 선택한 내 잘못이다. 집에 대한 꿈이 구체적이지 않았으니 계획이 흐릿할 수밖에 없고 그 계획 역시 여지없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가 배우, 연출가, PD 등 직업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꿈이 아니다. 어떤 배우가 될 것인가라는 지점까지 궁구해야 한다. 인테리어를 염두에 두지 않은 집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커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가 막연하게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꿈도, 더군다나 계획도 아니다.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버는지를 정해놔야 꿈을 가진 사람이다. 노트북을 사기 위해서라면 노트북을 향하여 직장으로 가야 한다. 막연한 것은 막연하기만 하다.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과 맞닥뜨렸을 때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 변명하고 남 탓하기가 일쑤다. 꿈이 구체적인 꿈이 되었을 때 그 꿈의 절반은 이미 이뤄진 셈이나 진배없다.

나는 연출가로서는 구체적인 꿈이 있다. 나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선량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 그래서인지 별로 지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 좋은 극장을 보면 흥분이 되고 좋은 배우를 보면 대사를 써주고 싶고 좋은 소재를 들으면 곧장 즉흥극을 만들고 싶다. 내 뒤꿈치를 따라다니는 다소의 곤궁은 꿈의 실현을 위한 감미료일 뿐. 연극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즐겁다.

이사는 엄벙덤벙했지만 또 배웠다. 세상에 브랜드가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도 배웠고 그 중에 나에게 맞는 한 가지를 선택할 때 미리 준비해야 낭패가 없다는 것도 배웠다. 막상 닥쳐서는 늦는다. 정말이지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게 천지다. 구체적으로 배워야 할 게 천지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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