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타작이 끝날 무렵 아이들은 줄지어 교문을 나섰다. 왼손에는 꽃모종 한 움큼, 오른손에는 호미 한 자루씩을 들었다. 4~6학년 모두였으니 350명은 됐다. 반으로 갈려 한쪽은 남쪽으로 나머지는 북쪽으로 신작로를 따라가며 미루나무가 줄지은 길가 양쪽에 정성껏 모종을 했다. 남북으로 4㎞, 10리쯤 됐을까. 한창 가물 때여서 먼지가 풀풀 일었지만, 아이들은 신이 났다. 교실에 갇히는 대신 밖에서 장난을 칠 수 있어서였다. 고무신으로 도랑의 물을 떠서 축 늘어진 모종에 부었다.
▦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며칠 뒤 쓰러져 누운 채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모종을 뽑아 튼튼한 놈으로 바꿔 심고, 장마철이 될 때까지 등ㆍ하교 길 틈틈이 물을 주었다. 튼튼히 뿌리를 내려 위로 뻗기 시작하면 가운데 윗동을 수시로 끊어 옆으로 가지가 벌게 했다. 나락이 누렇게 익어갈 무렵 신작로 양쪽으로 흰색과 분홍색, 선홍색 코스모스가 피어 올랐다. 가녀린 몸매나 수줍은 표정과는 달리 생명력과 번식력이 들꽃 못잖아, 일단 활착(活着)해 꽃피우고 씨를 떨어뜨리면, 이듬해부터는 따로 돌보지 않아도 주위에 꽃밭을 만들었다.
▦ 전교생을 합쳐 20명 남짓할 정도로 아이들이 줄고, 길가에 꽃이나 심고 있을 한가로운 일손도 없을 터이다. 그런데도 고향 길가 드문드문 코스모스가 피었다. 길이 포장된 뒤로도 여러 번 거친 보수공사를 떠올리며 설마 하다가도, 자꾸만 45년 전에 심은 그 코스모스의 자손들 같아 반갑다. 수없이 잘리고 꺾여 그때나 지금이나 키는 거의 비슷한 미루나무와 함께 고향 친구들의 어릴 적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한다.
▦ 올해도 어김없이 햇살과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애련한 가을 정취에 젖는다. 문득 순진한 시골 처녀 같은 이 꽃에 왜 이토록 거창한 이름이 붙었는지가 궁금해 백과사전과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코스모스(Cosmos)는 영어로 유니버스(Universe)와 함께 우주를 가리키지만, 주로 혼돈(Chaos)과 대칭되는 질서나 조화를 강조할 때 쓰인다. 어딘지 엉성하고, 그래서 더욱 예쁜 이 꽃과의 접점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세상에 모를 일이 한둘일까. 궁금증을 비워두어도 저리 고우면 그만이지.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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