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들 정부 보호 속에 내수시장서 외국기업 맹추격
한국 기술 앞섰지만 2년 못 버텨
높아진 중국 소비자 수준 맞춰 연구ㆍ생산ㆍ판매 현지화하고
중국 기업과 상생협력도 절실
몇 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했던 중국 토종기업들이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들을 제치고 글로벌 시장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가 시가총액 240조원으로 뉴욕증시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레노버는 PC 분야 글로벌 1위에 이어 휴대폰 분야에서도 샤오미와 더불어 삼성전자와 애플을 턱밑까지 위협하고 있다. 또 올해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기업’ 리스트에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에너지, 금융, 철강 등 분야의 중국 기업 100개가 이름을 올렸다. 이렇다 보니 그간 세계 최대시장 중국에서 어느 정도 특혜를 누려온 다국적 기업들이 중국 토종기업들과 힘겨운 경쟁 체제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 처지도 비슷하다. 휴대폰, 자동차, 디스플레이 등 주력 분야에서 중국 기업과 치열한 내수 및 글로벌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 기업들의 약진으로 급변하는 중국 내수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새로운 현지화 전략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기업들이 아직은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는 기술력을 토대로 중국에서 버틸 수 있는 골든 타임이 2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과연 우리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는 돌파구는 무엇일까. 현지에 진출한 삼성, 현대자동차, CJ 등 주요 대기업과 KOTRA 대표 등에게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를 직접 들어 봤다.
무섭게 부상하는 중국의 토종기업
올해 한중 수교 22주년을 맞은 우리 기업들은 그간 중국에서 ‘2단 뛰기’형태의 급속한 발전을 이룬 게 사실이지만, 중국 토종기업들이 턱밑까지 추격해오고 있어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맞춰 이제 다시‘3단 뛰기’를 위한 새로운 전략 마련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장원기 중국삼성 사장은 “그 동안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80% 이상이 생산하러 왔지 직접 물건을 팔려고 오지는 않았다”며 “이제는 생산에서부터 내수시장 판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삼성전자의 성공과 도전’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중국 기업의 빠른 성장 속도가 가장 큰 위협 요인이라고 지적했던 장 사장은 “1년 전의 예상이 이미 현실화된 상태”라며 “중국 기업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상황에선 단순히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한 생산기지라는 개념에서 탈피, 중국 내수시장에 맞는 제품 설계와 연구개발(R&D)에서부터 생산과 판매 등 전 과정을 하나로 엮는 철저한 현지화 구축이 시급히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CJ그룹 중국본사 대표는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세계적인 기업에 뒤지지 않는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해야 한다”며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모든 제품이 먹힐 수 있는 후진적인 시장이 아니며 중국 토종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이 올림픽 경기처럼 치열하게 다투는 경쟁 시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본사와의 소통 부족을 꼽았다. 박 대표는 “현지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중국 사업은 본국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급변하는 중국 시장의 속도와 글로벌 역량을 갖춰가는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현지 사업에 권한을 실어주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조직화를 시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기업들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분석도 이어졌다.
함정오 KOTRA 중국지역본부장은 “막대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반독점 제재 및 해외 기업 혜택 축소, 자국 기술 표준 도입 등 토종기업들을 위한 중국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작용하고 있다”면서 “글로벌시장에서 중국과 비슷한 소득 수준의 국가를 중심으로 ‘저가다매(低價多賣)’의 마케팅 전략을 효과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함 본부장은 “애플이나 구글의 모방을 통해 성장해온 중국의 신흥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 진입에는 선진국 기업들에 비해 한발 늦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중국 시장을 발판으로 혁신을 추진한다는 ‘중국식창신(中國式創新)’을 앞세워 글로벌 기업들을 거세게 위협하며 시장 확대에 대한 자신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태윤 베이징현대자동차 대표도 웬만한 기술력과 경쟁력을 가진 국내 기업 브랜드로 중국 시장에서 토종기업들과 경쟁하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다고 단언했다. 김 대표는 “중국 토종 브랜드의 경우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글로벌 기업과의 합작 및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선진 글로벌 브랜드와의 격차를 많이 좁힌 상태”라며 “특히 디자인 부문에서의 경쟁력 속도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고 진단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브랜드가 가진 품질 및 가격 경쟁력이 중국 시장에서 먹혔지만 이제는 한 차원 높은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며 “이제 중국인들도 어떤 브랜드가 좋은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져 글로벌 시장에서 우수한 평판을 가진 글로벌 브랜드여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내수시장 공략을 위한 현지화 전략
현지 법인장들은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이후 중국 정부의 경제정책 변화에 발맞춰 우리 기업들도 보다 혁신적이며 세밀한 현지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김태윤 베이징현대차 대표는 중국 정부의 대기 환경오염 규제와 반독점 규제 정책 등을 소개하며 “중국 자동차 시장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은 그 동안 집중해 온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친환경 신기술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며 “이젠 단순한 제품 및 가격 경쟁력이 아니라 현지에 적합한 친환경 신기술과 최고의 서비스가 뒷받침돼야 승산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시장에서 통했던 상품이나 서비스가 아니라 중국인들을 타깃으로 그들의 정서와 취향까지 반영한 보다 세밀하고 정확한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며 “이를 위해선 중국 소비자들과의 끊임없는 소통 노력을 통해 다국적 기업이 아닌 중국 기업으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CJ그룹 중국본사 대표는 “중국 사업의 현지화를 위해선 좋은 파트너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사업 파트너십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면 중국 내 배타적인 유통망과 법적 제재를 뚫을 수 있고, 전략적인 합작을 통해 시장 진입 비용 및 에너지를 절감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 사업의 가치와 성장잠재력을 평가할 때는 단기 수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투자 관점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현지화 전략을 위해선 중국 기업들의 잠재력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중국인들과 25년이 넘는 사업ㆍ교류 경험을 가진 그는 “흔히 꽌시(關係)라고 하는 네트워크 관리는 중국 현지의 특별한 사업 환경을 고려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며 “이를 통해 사업 환경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처하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시로 바뀌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신속히 대처하려면 위기관리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김태윤 베이징현대차 대표는 “중국의 산업은 자율경쟁 체제이지만 정부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정부 정책의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미래를 예측하면서 조심스럽게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최근 중국 정부가 벌이고 있는 다국적 자동차 업체들의 반독점법 위반 조사를 예로 들면서 “현대차를 포함한 중국 진출 기업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에 따른 자체 점검은 물론 새로운 규제 등 입법 동향에 대한 꾸준한 모니터링 등 위기관리 능력 강화가 필수적”이라며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공정경쟁시장 질서 확립에 따른 소비자의 합법적 권익 보호 등 준법 경영은 물론 소비자의 신뢰를 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노력 역시 현지화를 위한 중요한 전략”이라고 소개했다.
중국 기업과의 상생협력 방안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시대를 앞두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중국 토종기업과의 경쟁을 대비해야 하지만 상생 협력 역시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함정오 KOTRA 중국본부장은 “한중 FTA가 타결되면 중국 기업들과 새롭게 전략적 협력관계 설정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중국 기업을 저가 노동력을 활용한 임가공 파트너로만 생각하는 과거 풍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중국 내수시장 확대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서도 중국 기업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함 본부장은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 전략’을 소개했다. 중국 계림 지방에선 긴 부리를 가진 가마우지라는 새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는 순간 어부가 가마우지의 목에 묶어둔 줄을 당겨 고기를 삼키지 못하게 하고 대신 물고기를 가져가는데, 이를 한중 경제구조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함 본부장은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인 중국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기술력 및 부품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며 “우리 입장에선 이런 상황에 놓인 중국 기업들과 핵심 부품 위주의 ‘가마우지 경제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중국의 신흥 대기업들이 그 동안 삼성, 현대, LG 등과의 협력을 통해 검증된 국내 우수 부품 및 솔루션 기업들과의 관계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장원기 중국삼성 사장은 중간재 위주 교역의 구조적인 문제로 부진에 빠진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중국 기업과의 전방위적인 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장 사장은 “우리 수출의 25%를 점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아웃소싱이나 연구개발 등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협력모델을 적극 검토해 볼 시점”이라며 “우리 기업들이 저가시장에서 중국 기업에 밀리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구조적인 문제”라는 입장이다. 그는 “우리가 가진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어떤 식으로 가져갈 것인지, 나아가‘똑똑한 중국 기업’들과 협력을 통해 이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을 고민하는 것이 급변하는 중국 시장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이징=장학만 선임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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