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으로 보면 법은 개인 또는 집단간 다툼을 조정하거나 그들 행위가 사회규범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최종 심급이다. 특히 분쟁이 있는 경우 이해당사자의 갈등 조정을 위한 노력이 소진됐을 때 법이 등장한다. 따라서 개인 또는 법인간 분쟁 해결을 법에 위임하는 일은 매우 예외적이어야 마땅하다. 개별 다툼에 법이 자주 등장하면 정치경제적 이해교환의 마당인 시민사회와 시장은 법에 의해 식민화되기 십상이다. 그리되면 이해당사자들은 비용이 드는 교섭과정을 회피하고 법으로 달려간다. 실익 없는 당사자 교섭에 시간과 비용을 쏟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노사 모두에게 손실이며 자원의 낭비다.
어떤 곳보다도 법 과잉의 폐해가 극명한 곳이 노사관계 영역이다.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고용 및 관리 체계가 기업 단위로 제도화 된 것이 노사관계라면 핵심은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이해 조정이며 그 방식에 따라 노사관계는 상이한 양상을 띠게 된다. 합리적 조정과 계약에 바탕을 둔 경우도 있고, 싸움과 처벌이 지배적인 경우도 있지만 전자가 우월한 방법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구분을 따르자면 우리 노사관계는 후자에 가깝다. 소위 ‘법대로 해 보자’는 주장 아래 핵심적 이해 조정 대상에 대한 결정이 모두 법원에 위임됐기 때문이다.
먼저 임금문제다. 올해 노사간 갈등의 핵심은 통상임금 이슈였다. 통상임금은 초과수당 등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성 개념이다. 상여금이든 각종 수당이든 그 대상들에 통상임금성이 있는지 여부는 당사자들이 제일 잘 안다. 상여금이 어떤 맥락에서 설계됐고 규모가 얼마인지, 가족수당과 명절수당 등이 왜 설치됐는지 등은 기업 내 당사자들을 제외하곤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법원에 상여금 및 수당의 통상임금 포함 여부에 대한 판단을 의뢰하는 것은 난센스다.
고용문제도 그렇다. 우리 기업들은 경기변동에 대응해 물량을 조절해야 할 경우 인력보다는 노동시간을 통한 조정을 관행화해 왔다. 이로써 경기 후퇴의 시기에 비용조정과 고용안정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노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파레토 최적(Pareto Optimum)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런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기업은 고용 위험을 외부화 했고, 그 결과 비정규직 활용이 전면화됐다. 최근 쟁점인 사내 도급 근로의 적법성 여부에 대한 논란은 이 과정의 산물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기업이 위법행위로 고용관계를 왜곡하지 않았다면 고용을 둘러싼 이슈 또한 해결을 법률에 맡길 일은 아니다. 고용전략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전환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손배가압류’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많은 기업들이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에 대해 법원에 불법성 여부 판단을 요청하고 있다. 손배가압류는 파업의 적법성 다툼에 수반되는 형제 이슈로서, 노조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전형적 수단이며, 법적 권위를 이해조정의 영역에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대표 사례다. 쟁의권은 헌법에 기본권으로 보장된 노동3권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로 노조가 가지고 있는 교섭의 핵심적 담보물이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의 경우 법의 규정이 파업 사유를 제한한다 해도 파업권에 대한 법적 승인은 광범위하다. 설령 교섭의 대상이 경영권 영역에 속하는 항목이라 하더라도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친다면 파업의 대상으로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은 다툼하는 이해관계자의 의도를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의도가 게재된 관행과 교섭의 역사적 산물을 법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산업 갈등이 빈번하던 1950~60년대 던롭(Dunlop)은 산업화가 진전되고 다원주의가 정착되면 물리적 갈등이 관료제 내의 제도화 경쟁으로 수렴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의 우리사회 경향은 점점 더 이런 가정에서 멀어지는 느낌이다. 갈등은 외부화되고, 당사자간 자율 조정의 여지는 작아지며, 관료제적 시스템의 역할은 위축되고 있다. 다원주의의 주요 기둥인 핵심 당사자 그룹의 이해 조정 역할이 사라지고 법원만 비대해 지고 있다. 하루빨리 조정의 장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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