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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 50년… 빈호아의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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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파병 50년… 빈호아의 자장가

입력
2014.09.3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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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9000명 학살당했다는 중부지방 80여개 마을에 증오비

주민들 당시 참상 자장가로 전하기도

한국군 만행 감당하기 버겁지만 불편한 진실 더 이상 외면 안 돼

피해자는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해 서울에서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

백마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류진춘 경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7월 말 베트남 중부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에서 한국군 증오비를 살펴보고 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제공
백마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류진춘 경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7월 말 베트남 중부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에서 한국군 증오비를 살펴보고 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제공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이 노래를 부르며 뛰어 놀던 사람들은 베트남 중부의 빈호아 마을에서 처연한 자장가를 들어야 했다.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이 우리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마을 초입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쓴 낡은 ‘증오비’가 서있었다.

이곳은 베트남 중부 지방에 흩어져 있는 80여 곳, 9,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마을 중 하나이다. “단 한 번도 남을 침략한 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후예들이 거쳐 간 곳곳에 이런 증오비와 위령비가 들어섰다. 그리고 한국에는 100여 곳이 넘게 베트남 참전 기념비가 우뚝 섰다.

베트남전은 한국현대사의 ‘잊혀진 전쟁’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이 마련한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평화박물관의 베트남 평화기행단 일행은 지난 7월 28일 이 슬픈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니는 빈호아 초등학교를 찾았다. “우리 고모 할머니에요.” “우리 큰 이모에요.” 위령비에 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재잘대던 아이들에게 내놓기에 턱없이 적은 장학금과 선물이지만, 아이들은 참 고맙게 받아주었다. 운동장에 나와 보니 벌써 우리가 전해준 체육복 입고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2014년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5년은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이 통일된 40주년이고, 2016년부터는 주요 민간인학살의 50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베트남전쟁은 어떤 전쟁이었고, 그 전쟁에 우리 군대가 파견되었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미국역사에서 한국전쟁이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리지만, 한국현대사에서는 베트남전쟁이 바로 잊힌 전쟁이었다. 한국군 5,000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말이다.

이런 아픈 역사를 간직한 채 우리는 베트남과 다시 만나고 있다. 베트남 쌀국수집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베트남 노동자 수도 급격히 증가했고, 이른바 다문화 가정에서 베트남 여성을 아내로 맞은 경우가 가장 많이 눈에 띈다. 몇 해 전만 해도 전국 곳곳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절대 도망 안 감’ ‘될 때까지 맞선 보장’ 등 민망한 펼침막이 걸려있었다. 베트남 노동자들이 한국말을 배우는 교재의 첫 페이지가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월급은 언제 주실 꺼에요”로 시작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일도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이라는 대국 옆에서 민족적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오다 근대에 들어와 식민지배와 분단과 내전의 아픔을 겪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아주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친구가 되었어야 할 한국과 베트남이 1960년대 후반 이후 총을 들고 싸우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군 파병으로 美 전비 25억달러 절감

베트남전쟁이란 어떤 전쟁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 전쟁의 본질을 지금껏 외면하고 있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베트남과 주되게 싸웠던 미국에서조차도 이미 끝난 일이었다. 당시 미 국방장관으로 베트남전쟁을 수행했던 맥나마라는 1995년 회고록을 통해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민족주의적 성격을 과소평가하는 아주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했다. 바다 건너 미국이 아시아 약소민족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제의 지배를 당했던 우리는 왜 의병전쟁, 독립전쟁과 다를 바 없는 베트남전쟁에 침략자의 편에 서서 군대를 보내야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한 이유를 미국이 베트남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꼽지만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40년 가까이 지나 이라크전쟁에 또 우리 젊은이들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규정은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실 ‘자유십자군’이니 ‘반공십자군’이니 한국전쟁 때 받은 도움에 보답해야 한다느니 하는 명분 뒤에 가려졌지만, 베트남 파병을 평가할 때 흔히 ‘월남특수’라 불리는 1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효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베트남 파병이 시작될 무렵 마무리된 한일수교의 결과 한국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의 대가로 유상무상원조에 상업차관까지 합쳐 겨우 8억 달러를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월남특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일본은 우리의 10배가 넘는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며, 미국의 ‘더 많은 깃발 정책(More Flags Policy)’에 맞추어 깃발 하나 들 병력 20여명만 보낸 대만도 우리보다 조금 적은 경제적 이익을 거두었다.

베트남에 다녀온 병사들은 무려 32만명에 달한다. 처음에는 강제로 차출하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원자들을 보냈다. 당시 병사 선발 방침에 가급적 국민학교 3년 수료 이상을 선발하라고 한 것을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외국 구경은 꿈도 꾸지 못했던 젊은이들이 그저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자원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머나먼 이국 땅으로 가서 전쟁을 치른 한국 병사들이 받은 월급은 제 나라에서 징집된 베트남 병사들이 받는 월급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받는 월급은 필리핀군이나 태국군 소위의 월급보다 한참 적었다.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백색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했다는 비판을 완화시켜주는 등 전체적인 효과를 차치하고라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은 전쟁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한국군 1명의 연간 유지비가 5,000달러인 반면, 미군 1인당 유지비는 1만 3,000달러였으니 그 차액 8,000달러를 파월 한국군 연인원 32만으로 곱하면 미국은 무려 25억 달러 이상의 전비를 절감한 것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도 시력을 잃은 도안 응 이아가 지난 7월 베트남 중부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 자택을 방문한 류진춘(오른쪽) 경북대 명예교수와 이정우 경북대 교수에게 평화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제공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로 어머니를 잃고 자신도 시력을 잃은 도안 응 이아가 지난 7월 베트남 중부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 자택을 방문한 류진춘(오른쪽) 경북대 명예교수와 이정우 경북대 교수에게 평화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제공

불편한 진실 외면해서는 안돼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던 그 시절 한국은 너무나 가난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남의 나라 전쟁에 우리 젊은이를 보내고 그 피값으로 돈을 버는 일을 민망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로부터 근 40년 뒤인 2003년 이라크 파병 당시에는 ‘국익’이란 한 마디에 이라크 파병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속절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보통 시민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당혹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나라를 사랑하는 한국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은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베트남 피해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다.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민간인학살 자체야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전쟁범죄이지만, 참전군인들이 모두 학살에 가담했거나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1960년대 중반, 참전군인들은 아직 삶의 방향이 잡히지 않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을 이국의 전쟁터로 보내면서 정부와 우리 사회는 베트남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피부가 미친 듯이 가렵고, 반점이 돋고, 까닭 없이 아프고, 자식마저 픽픽 쓰러져도, 그 원인이 고엽제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몸은 고엽제에 병들고 마음은 전쟁 트라우마로 갈갈이 찢겨지고 가난과 박탈감에 시달려온 아버지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몸도 마음도 술버릇도 나빠지는 아버지 곁에서 자식들을 키우셨던 어머니들은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 한국군의 민간인학살로 자식을 잃은 베트남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또 어떻게 살아졌을까.

430여명이 희생된 빈호아 학살에서 생후 6개월밖에 안 된 도안 응 이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총에 맞은 어머니가 꼭 안아주어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핏물과 화약물이 눈에 들어가 도안 응 이아는 안타깝게도 빛을 잃었다. 밝은 세상을 기억하기에도 너무나 어린 나이었다. 슬픈 자장가를 듣고 자란 도안 응 이아는 그 자장가 대신 한국의 어린 학생들이 선물한 기타를 치며 ‘자그마한 봄’이란 평화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평화기행단원 중 제일 연장자이자 유일한 참전군인이었던 류진춘 경북대 명예교수가 제일 많이 우셨다. 서울에서 도안 응 이아의 노래를, 런 아저씨와 탄 아주머니의 증언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듣고 싶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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