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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설거지거리 없다는 최 부총리

입력
2014.09.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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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자영업보호 및 고용안정 대책 당정협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2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자영업보호 및 고용안정 대책 당정협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특기: 설거지.’ 자기소개서에 쓰고 나면 눈 밝은 그이가 묻는다. “장난하냐.” “진짜 그 설거지야?” 설거지에 대한 선입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실인 걸 어쩌랴. 본업인 취재나 기사작성 능력도 내세울 게 없고, ‘반짝반짝 작은 별’을 마스터한 뒤 턱 밑에서 뺀 바이올린은 현이 느슨해진 지 오래니 불혹 넘어 성취라곤 설거지밖에 없다.

나의 설거지 이력은 자못 진중하다. “삼형제의 맏이는 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압(?)에 초등학교 때 조기 입문한 뒤, 대학 시절 친척집에서 얹혀살면서 실전을 익혔고, 반년 가까이 다일공동체밥퍼에서 거의 매일 수백 명의 식판을 닦으며 전문 기량을 쌓았다.

결혼 이후 설거지는 아내의 불만과 집안의 갈등을 풀어주는 도구로 쓰인다. 제수씨가 두 명이지만 집안 대소사에 설거지는 주로 내 몫이다. 자정 넘어 귀가해도 꼭 음주 설거지를 하고, 가끔 아내가 씻은 그릇의 티를 귀신같이 발견해 죄다 다시 설거지하는 신공까지 선보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기가 질린 내 아내는 설거지를 거의 안 한다.

내가 거창한 페미니스트라거나 아내가 무서워서 설거지에 매진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시급 6,000원, 세상은 허드렛일이라고 업신여기지만 설거지는 반드시 필요하고, 여러모로 삶의 풍요를 담보하는 아름다운 노동이다. 가족 명절 봉사 사랑 배려 등에 설거지를 버무려보면 알 수 있다.

설거지에 이골이 난 나조차도 아내가 특별 음식들을 장만한다거나, 느닷없이 설거지 일감이 다량으로 떨어지면 두렵다. 예측 가능한 선에서 설거지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게 설거지를 가장 잘하고 뒤탈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몸으로 터득했기 때문.

그래서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광폭(廣幅) 행보와 거침없는 발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설거지 걱정이 앞선다. 취임 이후 돈은 있는 대로 쓰겠다고 공언하고 매주 한 건씩 정책들을 쏟아내더니, 이번 정부가 공약으로 내건 균형재정 달성 목표는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금리를 더 내리라고 잇따라 한국은행을 압박한다. 우리는 돈을 들여 특별 요리만 잔뜩 상에 올릴 테니 설거지는 누가 하든 모르겠다는 식이다.

일단 먹고 배가 불러야 산다는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다들 윗목에 사는지 내 주변엔 “배가 부를 것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부동산 회복 기미는 늘 그렇듯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고, 결국 그 핑계로 세금만 늘려 내 호주머니만 털어가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되레 전셋값이 올라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게다가 최 부총리가 소개한 차림표들은 요리가 제대로 될지도 의문이다. 영리병원, 케이블카, 재건축 규제 완화 등은 오랜 기간 사회적 찬반 논쟁이 고착화한 사안들이다. 케이블카만 해도 감초처럼 등장하는 해외 사례를 취사선택해 정반대의 결론을 낼 수 있다. 서비스업 활성화 대책 맨 꼭대기에 오른 외국 영리병원 1호는 졸속 행정으로 아예 폐기됐다. 잘못하면 설거지 걱정을 넘어 음식물쓰레기까지 떠맡게 될지 모른다. 처리 문제를 놓고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4대강을 보라.

설거지할 자신이 없으면 솔직히 상대의 양해를 구하는 게 차선. 정부는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국민 건강 증진이든(담뱃세), 10년간 못 올렸든(지방세) 누가 봐도 세금이 늘어나는 게 사실인데, 자꾸 증세가 아니라는 핑계만 댄다. 공기업 부채가 우려된다는 지적엔 D1, D2, D3(몰라도 된다) 등 복잡한 셈법으로 국민을 가르치려 든다. 차라리 “아들이 진 빚을 아버지가 내 빚 아니라고 모른 체 하는 콩가루 집안”이라는 세간의 논평이 보다 상식적이다.

최 부총리는 “경제가 살아나면 설거지거리 자체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복지 수준, 당장의 복지 의무지출에도 허덕이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면 요령부득이다.

내가 당한(?) 게 억울해 초등학교 1학년 아들에게 설거지 조기 교육을 시행 중이다. 2분 정도 집중시키려면 그보다 몇 갑절의 시간을 공들여야 한다. 핑계나 똑똑한 척은 통하지 않는다. 설득에 실패하면 설거지는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 하찮지만 엄연한 사실. 설거지를 오래 해보면 안다.

고찬유 경제부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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