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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에 맞선 민주화 성지...오늘도 약자 편에 서 있나요

입력
2014.09.2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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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모태부터 탄압의 역사...일제 군국주의에 동원 흑역사도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등장...유신 철폐·박종철 사건 고발 등 反독재 투쟁의 구심점 자리매김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엔 "기계적 중립 안타까워" 지적도

민주화 열망으로 뜨거웠던 1987년 여름이 가고 명동성당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성탄미사를 보기 위한 신자와 명동거리를 찾은 시민들이 엉켜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민주화 열망으로 뜨거웠던 1987년 여름이 가고 명동성당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성탄미사를 보기 위한 신자와 명동거리를 찾은 시민들이 엉켜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민을 업신여기고 언론을 죽이고 야당을 무시하고 검찰 법원을 무력화한 일당 독재 괴물의 시대가 시작됐다.”

“나라 망치고 교회 망치는 종북의 온상 정의구현사제단.”

2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증오의 말들이 맞부딪쳤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 창립 40주년 감사 미사에서 전종훈 신부는 현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같은 시각 명동성당 초입에서는 사제단 해체를 요구하는 보수단체 지지자들이 피켓 시위를 벌였다. 불과 한 달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한 장소, 사랑의 언어가 넘쳐야 할 교회에서 증오와 대립의 표현이 오갔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한국 사회에서 명동성당이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명동성당은 투쟁과 반목으로 점철된 역사가 집약된 곳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 정식 명칭인 명동성당은 그 모태부터 탄압의 역사와 함께 했다. 1784년 천주교 신자였던 통역관 김범우가 왕실의 박해를 피해 자신의 집에서 신앙공동체인 명례방공동체를 결성하고 교리 강좌를 열었는데 그의 집터가 조선대목구 주교좌본당으로 설정돼 한국 천주교 최초의 본당이 됐다. 1883년 천주교 조선교구는 이 일대 언덕의 일부, 즉 지금의 명동성당 일대를 매입해 1898년 5월 교회 건물을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명동성당은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됐다.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명동성당에서 열린 국위 선양 평화미사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한국 천주교회가 협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방 이후 종교적 역할에만 전념했던 순간도 잠시, 명동성당은 4ㆍ19혁명을 지지하는 등 이승만 정권 독재 반대투쟁을 시작하면서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섰다. 반대로 5ㆍ16쿠데타 직후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는 등 박정희 정권 초 ‘흑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다 1968년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명동성당은 명실공히 민주화의 성지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된 김 추기경의 영향으로 명동성당은 ‘내일’을 꿈꾸는 이들의 발원지이자 도피처로 자리매김했다.

1974년 7월 지학순 원주교구장 주교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학생들에게 활동자금을 대줬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9월 26일 명동성당에 사제와 신자 약 2,000여명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거리로 나섰다. 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 사회에 첫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첫걸음을 함께 했던 김병상 몬시뇰은 “처음에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서만 분개했는데, 신부들이 모여 사회 현안을 공부하다 보니 사회 곳곳에 부조리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정의구현사제단이 나아갈 길을 인권 보호와 민주화 요구로 설정하게 된 이유”라고 회상했다. 그의 말처럼 이날 발표된 시국선언문에는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 헌정 회복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 인사 즉각 석방 ▦국민 생존권 보장과 언론ㆍ보도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보장 등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다.

명동성당은 그 후에도 군사정권의 독재와 인권 유린을 고발하는 장이었다.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시국담화가 명동성당에서 발표됐다. 1987년 6월 항쟁의 발화점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에 대한 정의구현사제단 성명 발표도 마찬가지였다. 정의구현사제단 총무를 맡고 있는 김인국 신부는 “1980년 시국담화와 1987년 진상 규명 성명발표는 교회가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은 시민 시위대의 철야 농성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김 신부는 “당시 시위대 맨 앞에 추기경, 그 뒤로 신부와 수녀들이 섰다”며 “이를 보고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존중의 마음을 표했고 이로 인해 생긴 교회의 권위 때문에 공권력도 섣불리 농성장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명동성당은 더 이상 약자의 성소가 아니라는 지적도 많다. 이는 급격히 보수화한 한국 천주교의 모습을 반영한 말이다. 김인국 신부는 “교황은 가난한 자를 위한 가난한 교회,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라고 얘기했지만 염수정 추기경은 기계적인 중립만 지키려는 듯하다”며 “사회의 무게추가 이미 강자 편으로 기울어진 사회에서 기계적인 중립이란 곧 강자 편에 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천주교의 상징인 명동성당이 예전에 받았던 신망을 되찾기 위해 곱씹어봐야 할 말이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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