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지음ㆍ김희정 옮김
열린책들ㆍ320쪽ㆍ1만7,000원
움베르토 에코는 천재이자 기인이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고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인 그는 고대 철학에서 정치, 문학, 역사, 예술,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지적 관심사가 이렇게 넓을까 싶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에 지적 촉수를 뻗고 있다. 그의 다채로운 관심사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적을 만들다’는 에코가 밀레니엄 이후 10여년간 고전 모임, 문화 행사, 강연, 에세이, 신문, 학회, 정기 간행물 등을 통해 발표한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부제가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인데 그는 이것이 정식 제목이 됐어야 했다고 말한다.
책에 담긴 열네 편의 칼럼은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문체만 빼면 한 저자의 글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서로 다른 주제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의 제목이자 첫 칼럼인 ‘적을 만들다’는 미국 뉴욕에서 파키스탄 출신 택시 운전기사에게서 “이탈리아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코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 뒤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문학작품에 담긴 적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다 결국 “적의 필요성은 본능적”이라는 비극적 결론에 다다른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 ‘적을 만들다’ 외에도 열세 편의 칼럼은 에코의 번뜩이는 재치와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끔찍스러운 제목”이라고 스스로 말한 ‘절대와 상대’에서는 대립되는 개념인 절대성과 상대성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한다. ‘4대 원소: 불, 공기, 흙, 물’을 주제로 한 축제의 간담회에서 발표한 ‘불꽃의 아름다움’은 다채로운 사유와 문학적 인용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에코는 머리말에서 이 글에 대해 “내가 그 주제에 매료될 것이라고는(그것도, 뜨겁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멋진 도전이었다고 회고한다.
‘위키리크스에 대한 고찰’에서는 줄리언 어산지가 만든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국대사관의 기밀 외교 문서를 폭로한 사건에 담긴 함의를 다각도로 되새긴다. ‘보물찾기’는 교회의 보물에 관해 쓴 것이고, ‘상상천문학학’은 천문학과 지리학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쓴 글이다.
열네 편의 칼럼을 읽어 내려가는 여정은 흥미진진하지만 단숨에 책장을 넘길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글은 늘 능동적인 읽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에코는 정돈되고 완결된 지식을 전하는 대신 혼란스러운 지식의 중심으로 안내하며 독자를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책을 덮는 순간 독서가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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