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식민사관이 청산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기반한 역사교육이 이뤄졌다면 지금쯤 대부분의 국민들은 쌍공(雙空) 정이형(鄭伊衡ㆍ1897~1956년)이란 인물을 알고 있을 것이다.
1922년 만주로 망명해 정의부 제6중대장이 된 정이형은 1925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 경찰관출장소를 습격했다. 정의부 제8중대장 김석하(金錫河)는 초산(楚山)경찰서 추목(楸木) 경찰관출장소를, 제6중대 3소대장 김정호(金正浩)는 초산경찰서 외연(外淵) 경찰관주재소를 정이형과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했다. 3월 19일 새벽 5, 6시경 정이형은 6명의 중대원들과 함께 여해 경찰관출장소를 습격해서 니시카와 류기치(西川隆吉)·임무(林茂)·신현택(申鉉澤) 등 3명의 일제 경찰을 사살하고 출장소를 소각했다. 정이형은 또 1926년 2월 중국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가담했는데, 만주의 무장투쟁 세력과 국내의 천도교 세력, 백정들의 신분해방 단체인 형평사(衡平社) 사원 등이 결집한 혁명정당이었다. 고려혁명당의 위원장은 양기탁(梁起鐸)이었다. 양기탁은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된 민족주의자였다.
정이형 같은 무장투쟁가들이 자주 압록강을 건너 타격을 가하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는 1925년 6월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과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었다. 그 골자는 장작림이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 전역에 검거선풍이 일었고, 정이형도 1927년 3월 6명의 동지와 함께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됐다. 국내 습격사건을 주도한 그는 사형당할 운명이었다. 그는 1928년 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나는 약자로서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는 한 마디 외에는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일제는 1928년 3월 정이형에게 예상대로 사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일왕 히로히토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이른바 은사를 내린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정이형은 1945년 8월 17일 대전형무소 문이 열려 석방될 때까지 19년 동안 여러 형무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정이형은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딸 정문경에게 “가장 유효한 시기에 품행에 대한 조언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는…”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다. “문경의 장래를 위하여 명예상 주의할 것이며, 불행한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하여서라도 부디 주의하기를 천만번 부탁하고 싶다”는 절절한 이 편지는 그러나 불온하다는 이유로 딸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출옥 직후 정이형은 ‘8ㆍ15 출옥혁명동지회’를 만들고, 1946년에는 미 군정 산하에서 일종의 국회 역할을 하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선임됐다. 정이형은 입법의원 내에 ‘부일협력자ㆍ민족반역자ㆍ간상배(奸商輩) 조사위원회’라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에 선임됐다. 이때 초안을 잡은 친일파 처리 특별법은 부일협력자에 대해서 ‘3년 이상 10년 이하의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기간 동안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고 경찰, 군부, 행정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 산하의 관선의원들은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부족했다. 1947년 3월의 입법의원 회의에서 한 의원은 “부일협력자에게는 선거권만을 부여함이 어떤가?”라고 제안했는데 정이형은 “공민권 박탈은 가장 가벼운 형벌이다”라고 반대했다. “선거가 가까웠으니 이법의 실시를 보류하자”는 다른 의원의 질문에 정이형은 “처단 않으면 그들이 정권을 잡을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이후 이 법은 휴지조각이 됐고, 대한민국은 정이형의 예견대로 흘러갔다.
박근혜 정부가 잘한 것 중의 하나는 현재 일본 극우파의 역사 인식문제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거꾸로 친일파를 옹호하는 인사들을 중용하는 경우가 있어서 어느 것이 과연 정부의 본심인지 헷갈리게 하고 있다. 잇단 친일파 옹호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인호 씨가 공영방송 KBS의 이사장으로 적격이라고 생각하는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인호씨는 최근 ‘우리 역사 바로보기’라는 강연에서 “친일파 청산 주장은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논리 없는 궤변의 종착지는 ‘종북몰이’일 것이라는 예상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었다. 이인호씨의 논리에 따르면 친일파 청산법을 주도한 정이형은 6ㆍ25 때 인민군에 가담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이형은 인민군을 피해서 부산으로 피난 가서 1953년 봄까지 지냈다. 휴전 후 귀경한 그는 1956년 12월 서울 장교동 집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필자가 만나본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보수세력들, 즉 정상적인 우파들은 모두 친일파를 비판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상적인 보수세력은 애국을 지상(至上)의 가치로 삼는다. 매국과 보수는 공존할 수 없다는 평범한 상식을 강조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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